책이름 : 나비의 사상
지은이 : 김영춘
펴낸곳 : 작은숲
갈매기의 부리와 폭풍우 앞에서 / 나비는 쓰러지며 알을 낳는다 / 살도 피도 없는 날개를 파닥이며 / 목숨을 걸고 날아간다 / 머나먼 기다림을 / 떼를 지어 자욱이 덮는다 / 이것은 바로 / 가야 할 곳을 향해 떠나버리는 / 나비의 사상이다
표제시 ‘나비의 사상’(53 ~ 54쪽)의 3연이다. 이 시에서 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옛 이념 세대의 방황과 좌절을 찢긴 날개로 삶의 거친 바다를 건너가려는 의지로 묘사한 2003년도 제27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Lorentz, E.)가 주장한 나비효과로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어떤 일이 시작될 때 있었던 아주 작은 변화가 결과에서는 매우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이론과 사물과 자기와의 구별을 잊은 것, 바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심경(心境)을 말하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과 캐나다 국경의 수백만 마리의 나비가 가을이 오면 미국을 지나 멕시코 서부 전나무 숲까지 3천500㎞를 여행해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난 뒤 봄에 되돌아가는 경이로운 현상의 주인공 제주 왕나비(Monarch butterfly)를 떠올렸다.
이 시집은 시인이 이십여년만에 펴내는 두 번째 시집이다. 1부 18편, 2부 24편이 실렸는데 푸른숲의 사십편시선 시리즈는 시가 넘쳐나는 시대, 저마다 엄선한 알짬 시 40편을 실었다고 한다. 시인은 자서에서 “묵은 서랍장에서 90년대 중반 이후의 시들을 꺼내어 바람 부는 세상 속으로 내보낸다.”고 했다. 표사를 쓴 김진경과 안도현은 시인이기도 하지만 전교조 해직교사였다. 그렇다. 시인은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었다가 복직된 선생님이었다. 시인의 해직교사 시절인 90년대 중반. 익산 변두리 간판 없는 포장마차에서 안도현 등과 대책 없이 술을 마셨던 시인 정양이 발문 '내 거친 숨소리 내가 듣는다'를 맡았다. ‘집’(43쪽)에서 흙벽돌 6천장을 찍어 내 손으로 내 집 한번 짖는 내변산 형진이는 분명 부안의 농사꾼 시인 박형진을 이르고, 마지막 시 ‘마을에서 살고 싶었다’(75 ~ 77쪽)는 임기가 끝나자 곧장 고향마을에 내려와 오리농법으로 농사짓던 故 노무현 대통령을 회고한다. ‘흰머리’(60쪽)에서 ‘그 사람 있습니다’(74쪽)까지 일련의 시편은 전교조 시편이다.
시집의 끝에서 두 번째 시를 펼치자, 나의 의식은 돌연 정전현상을 일으켰다. 부제가 ‘이광웅 선생님을 그리워하면서’였다. 군산에서 전주로 가는 직행버스 안, 오장환의 <병든 서울>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버스 안내원의 신고에 의해 경찰은 군산제일고 국어 교사 이광웅이 제자에게 시집을 빌려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른바 ‘오송회’ 사건의 서막이었다. 1982년 겨울, ‘고교교사 불온서클 적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신문 사회면을 채웠다. 오송회 사건은 故 이광웅 시인을 비롯한 군산제일고 전ㆍ현직 교사 9명을 경찰이 이적단체 조직과 간첩 행위 등으로 구속한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평소 독서모임을 하는 이들은 막걸리를 사들고 학교 뒷산에 올라 4ㆍ19 혁명과 5ㆍ18 광주항쟁 희생자의 추모식을 갖고 시국토론을 한 것이 전부였으나 경찰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몰았다. '오송회(五松會)'란 이름은 5명의 교사들이 소나무 아래에 모였다고 해서 경찰이 지어낸 것이다. 이들은 82년 11월 전북경찰청 대공분실에 불법 연행돼 20~40일 동안 고문을 당한 뒤 기소됐다.
빈집의 빈방 시린 구들장에
한 사내를 마음껏 눕힌 한 시대여
‘옛집에 눕다’(55쪽)의 한 구절이다. 짐승의 시대 80년대를 견뎌 온 시인의 순결한 정신을 회고하는 지금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