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글로리홀

대빈창 2015. 7. 24. 07:00

 

 

책이름 : 글로리홀

지은이 : 김현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SF, 포르노그래피, 하드코어 야오이물(여성들이 즐기는 남성 동성애물), 팬픽(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쓰는 소설), 1950 ~ 60년대 영미권 대중문화와 하위문화 보고서, 비트와 히피세대에 바치는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 정치권력에 대한 풍자적 알레고리, 로드무비(주인공이 이동해 가는 경로를 쫓아가면서 줄거리가 진행되는 방식의 영화) 형식의 청춘 성장 드라마 등. 시의 성격을 논하면서 해설 ‘본격 퀴어 SF - 메타픽션 극장’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넘보다 무려 250여 쪽을 넘는 부피를 자랑하는 신간 시집을 발견하고 덥석 손에 넣었다. 한마디로 뇌세포에 균열을 일으키는 난해하기 그지없는 시집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무한정 브레이크를 거는 쉴 새 없이 나타나는 각주들은 흡사 박상륭의 「七祖語論」의 고통스런 책읽기를 연상시켰다. 각주들마저 메타픽션(가상 텍스트에 대한 주석 달기)이니 두통의 강도는 더하다. 시 ‘늙은 베이비 호모’에 나오는 글로리홀에 달린 각주는 이렇다. ‘이 구멍에 도움을 준 공중화장실을 대신하여, ······’ ‘글로리홀’은 게이들의 은어로, 공중화장실의 칸막이벽에 뚫린 구멍을 가리킨다.

나는 시집을 시간의 짬이나 틈을 메우는 독서로 즐겼다. 하지만 이 시집은 아니었다. 부피도 부피려니와 난해의 극점을 지향하는 두터운 시집은 독서대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휴대용으로 대신 부피가 있는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시 ‘국경’의 각주 5)는 이렇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바케스 집안이 백 년 동안 술값 대신 고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 나는 흘러간 팝송이 연상되는 시편들이 그래도 반가웠다. ‘게리가 무어라고 하던 복제품을 위한 추도사’에서 1983년 ‘KAL기 격추 사건’을 규탄한 게리 무어의 노래 Murder in The Skies와 록 그룹 ‘신 리지’와 ‘스키 로드’를. 톰 존스의 ‘Green Greengrass Of Home’, 비틀즈의 ‘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그리고 ‘밥 딜런’까지.

시인은 인권영화제 기획자로 연대가 필요한 투쟁현장에 함께 했다. 시집을 여는 시 ‘비인간적인’은 한진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각인된 인상을 시로 형상화시켰다. 그러고보니 시집은 정치적이었다. 시 ‘그린그래스Greengrass가 사라졌네’의 녹색사업, 토목건축, 애드벌룬, 카지노선, 연대투쟁가, 가뭄과 홍수 그리고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까지. 각주의 네 개의 강이 사라진 3행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의 눈길은 187쪽 이 구절에서 멈추었다. - 그때가 명박한 쥐의 대가리가 끊긴 날이요, -

반전은 뒷표지에 숨어 있었다. ‘인간’ 전문이다. ‘시인의 말’로 보였다. 또한 난해한 본문의 시에 질린 독자에게 나도 이런 정상적(?)인 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항의(?)이기도 했다.

 

 

생명력을 주관하는 열세번째 천사는 / 고요하고 거룩하다

밤이 되면 / 잉크를 쏟는다

영혼에 동공을 만드는 것이다

저거 저 먼 구멍을 보렴 / 너에게로 향하는 눈동자

가슴의 운명은 / 빛으로 쓰인다

생명은 태어나고 / 죽음으로 끝이 난다

열네번째 천사는/ 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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