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대빈창 2015. 9. 21. 05:27

 

책이름 : 소

지은이 : 김기택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은 초사실주의(超寫實主義) 또는 극사실주의(極寫實主義)라고 한다.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처럼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며, 우리 눈앞에 항상 있는 이미지의 세계를 현상 그대로 취급한다. 시집을 덮으면서 떠오른 미술사조였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사무원』에서 나의 눈길은 「대칭 2」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작고한 사진작가 최민식의 외팔 - 외다리 신문팔이를 시적 형상화한 시인의 핍진한 묘사 때문이었다. 그 여운은 깊었다. 나는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펼쳤다. 시인은 그동안 ‘동물 이미지의 형상화에 있어 남다른 개성’(94쪽)을 보여 주었다.

 

달팽이 / 병아리 / 귀뚜라미 / 여치 / 소 / 수박 / 개 / 황소 / 송충이 / 비둘기 / 타조 / 낙타 / 토끼 / 말 / 매미 / 돼지 / 고양이 / 명태

 

시집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다. 이번 시집은 부의 구분 없이 57 시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이혜원의 「거대한 침묵」이다. 시집의 두 번째 시「자전거 타는 사람」의 부제는 ‘김훈의 자전거를 위하여’다. 책장에서 김훈의 에세이 『자전거 여행』을 꺼냈다. 그렇다. 이 시는 에필로그였다. 끝에서 두 번째 시는 「교동도에서」다. 시인은 눈 쌓인 교동도의 겨울 들녘에 섰다. 수천마리의 철새들로 들판은 검게 보였다. 시인이 탄 승용차가 다가서자 까맣던 겨울 들판의 부동자세가 흩어지면서 겨울 하늘에 점으로 촘촘히 박혔다. 여기서 겨울 철새는 분명 기러기다.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9번째 큰 섬으로 곡창지대다. 콤바인에서 떨어진 알곡을 주워 먹으려 기러기가 넓은 섬 들녘을 시커멓게 덮었다. 시인의 ‘특유의 치밀한 관찰과 묘사의 능력’(94쪽)은 이번 시집도 예외가 없었다. 표제시 「소」(17쪽)의 1·2연이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시를 읽으며 순한 눈망울의 한우가 구제역 발생 반경 3㎞ 이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살처분 매장당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산업화되기 전 이 땅의 소들은 ‘생구(生口)’라고 불리며 한 식구로 대접받았다. 핏줄은 아니지만 한 집에서 밥 먹고 사는 노비나 종을 이르는 말인데, 짐승으로 유일하게 생구 대접을 받은 것이 소였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소 몫을 농기계가 대신하자 소는 식용가축으로 전락했고 워낭소리가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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