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

대빈창 2015. 9. 25. 07:00

                                     

 

책이름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

지은이 : 박준

펴낸곳 : 문학동네

 

〈문학동네 시인선〉은 연륜이 짧다. 〈창비 시선〉, 〈문학과지성 시인선〉, 〈실천문학의 시집〉, 〈민음의 시〉는 수백 권이 쌓였는데, 이 시집은 문학동네의 32번째 시집이다. 시리즈의 표지 디자인은 단순한 원색인데, 이번 시집은 갈색이다. 요즘 시집을 즐겨 잡고 있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시인선이다. 정성을 기울인 시집의 장정 때문이다. 사철방식은 손으로 실을 꿰맨 옛 서책을 따랐고, 본문의 종이는 습자지처럼 반투명하다. 내가 잡은 시인선으로 세 번째다. 앞선 두 권은 시인선 1 - 『아메바』와 5 - 『방독면』으로 일반 시집보다 판형이 두 배 큰 특별판이었다. 소설책보다 큰 시집은 가로로 눕혀 아래에서 위로 시집을 넘겨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중 처음 일반판을 손에 잡았다. 다른 시집들처럼 책의 왼쪽 모서리를 묶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는 방식은 같지만, 시집은 세로 크기가 기형적으로 길쭉하다.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으로 4부에 나뉘어 62편이 실렸다. 발문은 시인 허수경의 「어떤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며 시인은 시를 쓰네」다. 젊은 시인답지 않게 시는 슬픔을 고백하고, 절망을 건네는 삶을 노래했다. 자신의 경험적 삶을 노래한 특별하지 않은 시들이 나는 좋았다. 솔직히 2000년대 등장한 젊은 시인들을 일컫는 미래파의 난해함은 서정시의 전복을 꾀한다는 오해(?)를 샀다. 그만큼 독자와의 소통이 불가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표제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55쪽)의 3·4연이다. 인프라가 전무한 불우한 환경에서 문학을 하는 이 땅의 시인들은 매한가지였다. 시인은 많은 시간을 투자해 잡문을 긁적이고, 남의 글을 더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그 고료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충당했다. 시편들은 시인의 가난한 유년시절과 고시원·미용실 화재사건, 군인에게 학살당한 남편으로 혼자된 치매노인 등 불편한 시대사가 그려졌다. 그리고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미인’은 죽은 누이였다. 마지막 시 「세상 끝 등대 2」는 속옷 차림으로 방문을 열고 거실을 내다보는 젊은 여자의 뒷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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