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보길도에서 온 편지
지은이 : 강제윤
펴낸곳 : 이학사
무엇이 부끄러운가 / 한 시대가 저물고 / 시대에 몸 바친 청춘이 저물고 / 날도 저물어 / 이제 / 밤이 되면 / 서리 내리고 눈이 오리라 / 겨울 또한 깊어지리라 / 그러나 무엇이 부끄러운가 / 이룬 것 없이 사라져 간 열망이여 / 얻은 것 없이 좌절된 꿈들이여 / 함부로 말하지 마라 / 함부로 말하는 자 / 두려워 마라 / 용서하지도 마라 / 한 시대가 저물고 / 시대에 몸 바친 청춘도 저물어 / 밤 깊은데 / 그렇다고 무엇이 부끄러운가
「어떤 삶의 기록」의 '2. 시대를 살다'(213 ~ 214쪽)의 전문이다. 표사에서 시인 박노해는 ‘한 시절 열정으로 내달리던 그’를, 환경운동가이자 소설가인 최성각은 ‘피로 인한 분출의 시대’를 살았던 시인을 떠올렸다. 나는 시를 읽으며 노동해방문학과 춘천교도소의 영어의 몸이 된 시인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노동해방문학은 박노해, 이정로가 이끌던 사노맹의 준 기관지로 알려진 월간지였다.
90년대 중반, 나는 배낭을 둘러메고 남도 답사에 나섰다. 고산이 경영한 남해의 낙원 보길도를 그리며 카페리에 몸을 실었다. 함양 덕유산에서 유기농 오미자 농사를 짓는 후배에게 안부 전화가 왔다. 보길도행 배안이라고 하자 후배는 이왕이면 〈동천다려〉에서 묵으라고 일러 주었다. 돌집 민박은 세연정을 발치에 둔 낮은 산자락의 숲속에 운치 있게 자리 잡았다. 유자나무, 동백, 대숲, 차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배나무, 오얏나무, 후박나무, 귀쪽나무, 느릅나무, 배롱나무, 자목련, 석류나무, 매화, 포도나무 등. 시인은 나무 욕심이 많았다. 책에 나오는 집터의 묵은 나무와 돌집을 짓고 시인이 새로 심은 나무들이다. 몇 년이 흘렀고, 나의 발걸음은 두 번째 보길도를 찾았다. 찻집에서 시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유홍준 교수가 시샘한 황지우 시인의 전남 담양 명옥헌의 집필실을 떠올렸다. 고산의 세연정과 오솔길로 연결된 시인의 〈동천다려〉도 그 못지않은 안복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나의 아둔한 식견이었다. 시인은 고산을 이렇게 평가했다. “낭만적인 시인이 아니라, 지배자로 군림하며 섬 주민을 억압한 권력자”였다고. 그렇다. 고산은 막대한 부를 임진·병자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만의 낙원을 건설한 못난 졸부(?)였다.
시인은 20년 만에 귀향한 고향 보길도를 떠나 유랑의 길에 올랐다. 2006년인가 티베트 기행을 끝내고, 한국의 섬 500여개를 하나하나 걷기 시작했다. 2008년 여름. 주문도에 발길이 닿은 시인과 선창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시인은 고맙게도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않는 나라』를 보내왔다. 그리고 올 여름 지붕 위 닥트가 조잡한 플라스틱으로, 벽돌 건물 묵은 김 공장을 카메라에 담는 시인과 우연히 마주쳤다. 하루 두 번밖에 없는 뭍을 나가는 막배가 떠나겠다는 고동을 울렸다. 시인은 지금도 섬을 걷고 있을 것이다.
보길도 청별항 → 황원포 → 세연정(세연지, 회수담, 동대와 서대, 옥소대) → 부용리 동백숲 → 낙서재 옛터(곡수당, 곡수대, 동와, 서와) → 동천석실. 「보길도, 낙원으로 가는 짧은 여행」에서 시인이 권한 보길도 여행 코스다. 고산 유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피서객들을 위해 검은 갯돌 예송리 해변과 중리·통리 백사장 그리고 부황리 계곡과 선창리 일몰을 덧붙였다. 나는 시인의 시집을 찾았다.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시인은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않는 나라』에서 『당신에게, 섬』까지 줄곧 산문집만 펴냈다. 시인은 1998년에 등단했다. 그때 시인의 15여년이나 묵은 책이 불현 듯 떠올랐다. 이 책은 보길도 시인이 20여 년 만에 고향에 터를 잡고 쓴 시와 짧은 산문 모음집이었다. 시인의 현실 인식 한 단면이 드러난 구절을 마무리로 삼는다. "고창 선운사의 동백이 이름 높지만 4월이 지나서야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시련 없이 피는 꽃을 어찌 동백이라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그 꽃은 미당과 추종자들, 호사가들이 문학으로 피운 꽃일 뿐이지 현실의 동백꽃은 아닙니다."(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