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대빈창 2015. 10. 23. 03:18

 

 

책이름 :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지은이 : 김민정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마시는 남자의 목에 걸린 금줄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는 불광동 개고기집, 입대 전날 아빠의 동정이 묻힌 학익동 옐로우하우스, 초미니스커트를 입었지만 허벅지에 신신파스를 붙인 소녀, 이웃 아낙네와 수다를 떨다 순간 터져 버린 엄마의 멘스, 오줌을 누고 밑을 딱은 휴지에 묻은 빨간 고춧가루 한 점, 여선생한테 섹스가 좆나 하고 싶어서 결혼하느냐고 묻는 초등6년 남자 어린이들, 스페인 여행 중 오줌이 흘러넘치는 열차바닥에 앉아 어깨동무를 풀지 않는 흑인 남자와 백인 소녀 커플, ‘나는 네미 씹할 왕자지’라는 코팅된 문구를 룸미러에 달고 다니며 승객에게 보여주는 바람나 도망 간 파마머리 아내에 이를 가는 택시기사, 식수염대신 정액으로 소독해 준다며 꼬시는 서울역 양아치 오빠, 나는 빨강팬티에 날개형 화이트를 달고 남자는 사정 후 덜 싸맨 콘돔을 창에 던진다. 피에 젖은 수십 개의 생리대를 빨간 리본으로 묶고, 고양이 뼈가 관절염에 좋다는 것을 아는 소녀와 애인의 바지를 벗겨 좆을 무는 언니들, 부풀 대로 부푼 사내의 자지가 빵 밖으로 삐져나오는 소시지이고, 백화점 매장에서 화장품을 고르며 신용카드를 긁고 할인쿠폰까지 챙기는 여승.

 

여자 시인은 한 마디로 솔직하고 도발적이었다. 나의 터무니없는 문학적 엄숙주의를 맘껏 조롱하고 있는 듯 했다. 시편마다 욕설과 비어, 속어, 육두문자가 난무했다. 비속어의 남발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에 나는 거북하고 불편했다. 이 시집을 어떻게 집어 들게 되었을까.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년, 창작과비평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2009년 16쇄, 창작과비평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2010년 40쇄, 마로니에북스)

 

백 여 권이 훌쩍 넘는 책장의 시집 중 여성 시인의 시집은 달랑 세 권 뿐이다. 그중 두 권은 유고 시집이다. 시인의 산문집 『각설하고』에 나오는 ‘민중가요와 전태일을 얘기하며 우시는 노 문학평론가’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귀띔했다. 나의 손끝은 머뭇거리다 산문집을 제치고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 가닿았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60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김인환의 「공백의 안무」다. 표제시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는 연착된 막차를 천안역에서 기다리다 플랫폼에서 만난 해진 군용점퍼 아래로 치모가 삐져나온 노숙자에 대한 연민을 말하고 있다. 젊은 여자 시인의 발랄한 언어유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뒤표지 글의 전문이다.

 

어느 여름 / 예식장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 계단 위의 한 여자, / 어깨너비로 다리 벌린 채 우뚝 서 있었다. / 발목과 발목 사이에 걸쳐진 그것은 / 그러니까 팬티였다.

나라면 추켜올렸을까, / 아니면 벗어버렸을까.

더러운 팬티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 / 낡은 팬티를 구차해하기보다 / 고무줄의 약한 탄성을 걱정하는 데서부터 / 시라는 것을

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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