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명정 40년

대빈창 2015. 10. 27. 02:17

 

책이름 : 명정 40년

지은이 : 변영로

펴낸곳 : 범우사

 

한 해 빨리 6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술로 자주 빠졌다. 만취해 집까지 왔으나 앞마당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덩실덩실 춤을 추고, 물동이를 인 촌부(村婦)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려했다. 한여름 밤 친구 집에서 술인지 잠인지 깨 오줌이 마려워 나체로 마루로 나섰다가 모기장 속 잠에 빠진 부녀자들께 넘어지고 변소인 줄 알고 방뇨를 시원하게 보았으나 김치광이었다. 이러니 길바닥이나 다리 위에 쓰러져 잠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엄동설한의 홍제동 공동묘지 상석 위였다. 당연히 몸이 동태처럼 굳어 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반민법(反民法)에 걸린 인사들이 바둑을 두자 판을 엎어버리고,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옆자리 사람이 변소를 간 사이 오줌을 탄 맥주로 골탕을 먹였다. 술 취했다고 차에 억지로 끌려 탄데 분노를 못 이겨 달리는 차에서 차창을 깨뜨리고 아스팔트로 뛰어내려 발목이 부러졌다.

 

이 전설적인 술주정 일화의 주인공은 수주(樹州) 변영로(1898 ~ 1961년)다. ‘그때나 이제나 누가 술 먹자는데 거절을 한다든지 사퇴를 한 적은 별로 없'(56쪽)는 수주였지만, “개가 똥을 끊지, 그 자가 술을 끊다니 거짓말이다.”(87쪽)라는 비아냥을 한 귀로 흘리며 은패를 맞추어 몸에 지니고 6년여를 금주했다. 수주 변영로는 민족시인으로,

- 거룩한 분노(憤怒)는 /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情熱)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라는 시「논개」(1연)로 잘 알려졌다.

제목의 명정(酩酊)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몹시 취한 상태’를 말한다. 이 책을 잡고서야 나는 명정의 올바른 뜻을 알았다, 그동안 나는 명정을 ‘술을 아무리 먹어도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지는 상태’로 알고 있었다. 밤새 술을 목구멍에 퍼 넣어도 취하지 않는 날이며 나는 주우(酒友)들에게 명정의 뜻을 풀이해주었다. 이런 망신살이. 도대체 나는 이 말을 어디서 누구에게 주워들었을까. “비싼 술 먹고 왜 가만있느냐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술주정을 사주했던 젊은 날 술 선배들의 가르침이었을까. ‘술로 빚은 웃음의 기록, 유쾌한 실태기(失態記)’ 명정기(酩酊記)의 백미는 ’白晝에 소를 타고‘(51 ~ 55쪽)였다.

문단의 알아주는 술꾼 공초 오상순, 성재 이관구, 횡보 염상섭이 수주집에 내방했다. 돈이 없던 수주는 동아일보에 선불로 원고료 50원을 받아 소주 한 말과 쇠고기를 삶아 사발정 약수터(성균관 뒷산)로 술야유를 나갔다. 실컷 술을 주거니받거니 흥이 돋았는데,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이에 공초가 옷을 모두 찢어버리자고 제안했다. 크게 취한 4인은 언덕아래 소나무에 매여 있던 소를 잡아타고 나신으로 성균관 큰거리까지 진출했다. 큰 봉변을 당하고서야 시내로의 진출은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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