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순간의 꽃
지은이 : 고은
펴낸곳 : 문학동네
작금 한국 문단의 대표 시인을 꼽으라면 열의 아홉은 분명 고은을 치켜세울 것이다. 몇 해 전 나는 시인의 시집 세 권을 손에 넣었다. 『전원시편』과 『뭐냐』를 먼저 잡았다. 아꼈던 시집을 이제야 펼쳤다. 시집의 1판 1쇄는 2001년 4월 30일이다. 벌써 15년 전 저쪽의 세월이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그 꽃(50쪽)
시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시다. 나도 눈에 익은 시다. 나는 뒤늦게 시집을 잡았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온라인서적에서 시집은 항상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 땅의 베스트셀러는 만들어졌다. 89년 초겨울. 나는 한 학기를 남긴 대학을 떠났다. 신흥도시 안산의 변두리 지하방에서 자취를 하며 공단의 화공약품 공장에 적을 두었다. 그때 수많은 거리의 군중들 손에 들린 책은 김우중의 인생철학 에세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재벌총수의 부피 얇은 에세이는 대우그룹 산하 노동자들에게 공짜로 주어졌다. 당연히 일간지 베스트셀러 목록의 첫줄을 차지하고, 길거리의 대중들은 너도나도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가 노동자 계급의 당파적 시각으로 가진 자의 글을 비판한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는 노동자 거리에서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튼 베스트셀러에 대한 나의 가자미 시선은 이 땅의 왜곡된 독서문화에서 저만치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시집은 5 ~ 10행의 짧은 시 185편(솔직히 나도 장담할 수 없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았으니까)이 제목도 없이 부호(*)를 경계로 줄줄이 사탕처럼 엮였다. 직관과 통찰에서 온 잠언, 생명과 자연 예찬, 시와 혁명의 80년대 감옥생활에 대한 회고 등. 짧은 시편들을 통해 막힘없이 풀려나왔다. 이 시집은 『뭐냐』와 함께 시인의 일종의 선(禪) 시집이었다. 덧붙인 말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이 작은 시편 1백여 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날마다 한편 두 편 작은 시편들을 쓰고 있다. 이것이 내 유일한 수행이라면 수행이고 싶은 것이다.” 기다리다 보면 시인의 ‘작은 시편’을 또 잡을 수 있다는 기분 좋은 전언이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다. 시편들을 읽어 나가다 나는 여기 한참 머물렀다.
고군산 선유도 낮은 수평선 / 해가 풍덩 진다 // 함부로 슬퍼하지 말아야겠다(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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