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긴 노래, 짧은 시

대빈창 2015. 11. 5. 07:00

 

 

책이름 : 긴 노래, 짧은 시

지은이 : 이시영

엮은이 : 김정환, 고형렬, 김사인, 하종오

펴낸곳 : 창비

 

“지금 부셔버릴까” /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 “그래도 안돼······” /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 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 가만히 일어나 앉아 / 칠흑처럼 캄캄한 밖을 내다본다

 

「공사장 끝에」(42쪽)의 전문이다. 시편을 읽어나가다 여기서 가슴 한 구석이 찡하게 울렸다. 철거반원들의 소리를 죽인 대화에서 서울 변두리 철거민들의 애타는 풍경이 그려졌다. 시선집은 3부에 나뉘어 80편이 실렸고, 해설은 시인 김정환의 「시의 장면과 시라는 장면, 그리고」로 부제가 - 이시영 소론, 그의 데뷔 40주년 기념 시선집에 부쳐 - 다. 시선집의 초판은 2009년 8월에 발간되었다. 약관 20세에 등단하여 시력 40년이 쌓인 ‘민족·민중문학의 맏형’ 시인 이시영의 첫 시선집을 후배 문인 김정환·고형렬·김사인·하종오 시인이 꾸몄다. 그동안 나온 시인의 시집 11권에서 네 명의 후배 시인이 작품을 고르고 해설을 썼다. 표제 『긴 노래, 짧은 시』는 시인이 사석에서 자신의 40여년 시 창작을 표현한 말에서 따왔다.

시선집을 잡으면서 나는 시인에게 미안했다. 70 ~ 80년대 군홧발정권 시절,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참호였던 ‘창비’를 이끌던 시인의 시집을 처음 잡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시선집을 엮은 시인들의 시집이 책장에 자리 잡았다. 나는 80년대 중반 창비 영인본을 통해 현실인식에 눈을 떴다.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산 증인으로 독재정권과 맞붙었던 시인의 삶은 이 땅 문단의 고난사와 맥을 같이했다. 시인의 ‘40년 시력’에서 엄선된 시편들은 민중들 삶의 희로애락과 시대정신이 담긴 산문시, 단시와 이시영표(?) 서정시의 정수를 모았다. 나의 눈은 도시화·산업화의 근대화 과정이 강제한 농촌 공동체의 몰락과 도시의 황폐화를 그린 산문시편에 한참 머물렀다.

 

장사나 잘되는지 몰라 /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시푸른 사과들 /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 어릴 적 우리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후꾸도」의 일부분, 14쪽)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정님이」의 일부분,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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