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살아남은 자의 슬픔
지은이 : 베르톨트 브레히트
옮긴이 : 김광규
펴낸곳 : 한마당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표제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117쪽)의 전문이다. 분명히 이 시였을 것이다. 30여 년 저쪽의 세월. 낭만적 객기로 탄광과 노가다로 젊음을 소비하다 할 일 없이 복학한 80년대 중반 그 해 봄. 명색만 하숙생이었지, 한 달째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던 하숙집 할머니가 나를 찾아 나섰다. 나는 그때 등교는커녕 술독에 빠져 뻔뻔스럽게 자취하는 후배에게 빌붙어 살았다. 후배는 알아주는 문청이었다. 붉은 벽돌을 세우고 톱으로 켠 베니어판을 얹혀 벽에 붙인 간이 책장에서 분명 이 시집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나의 학창시절인 80년대는 ‘혁명적 낙관주의’가 시대적 서정이었다. 80년 5월 신군부의 광주학살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이 젊음을 옥죄였다. 김포들녘의 촌놈에게 새롭게 현실인식을 틔어 준 책은 문예사상잡지 〈녹두꽃〉이었다. 엎질러진 막걸리, 식어빠져 굳어가는 순대 토막, 입 꼬리의 허옇게 말라가는 침버캐. 그리고 후배와 나는 한 학기를 남겨두고 나란히 공장으로 향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 1956년)는 20세기 서양연극사를 대표하는 독일 희곡작가이자 연출가다. 그는 히틀러의 핍박을 피해 15년간 망명(프라하, 비엔나, 쮜리히, 덴마크의 스벤보르, 노르웨이, 미국 캘리포니아)생활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독에 돌아왔다. ‘서사극’과 ‘낯설게 하기’ 이론의 창시자인 브레히트지만, 동토의 왕국 이 땅은 1989년까지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금서 조치했다. 이 책으로 1985년 그의 시 47편이 처음 이 땅에 소개되었다. 시집은 5부로 나뉘어졌는데, 해설은 옮긴이인 시인 김광규의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詩의 使用」이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짬이 나면 가끔 들르는 환경운동단체 사이트에서 「노자(老子)가 떠나던 길에 도덕경(道德經)을 써주게 된 전설」을 접했다. 내 기억력이 뛰어난 것인지, 착각인지 모르겠다. 책 판형과 표지 그림이 그때 그 시절 그대로였다. 그리고 정기구독하는 잡지 〈녹색평론〉에서 보았던 이 시를 오랫동안 눈 속에 담았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나의 어머니」 전문,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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