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대빈창 2016. 2. 26. 07:00

 

책이름 :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지은이 : 김태정

펴낸곳 : 창비

 

보세요 당신 / 그 거친 손에서 달구어진 아이롱처럼 / 이밤사 순결하게 달아오른 별들을 / 따버린 실밥들이 하나 둘 쌓여갈 때마다 / 활발해지는 이 어둠의 풍화작용을 / 보세요, 땀방울 하나 헛되이 쓰지 않는 당신 / 누구의 땀과 폐활량으로 오늘밤 / 하늘의 사막에 별이 뜨는지

 

「해창물산 경자언니에게」(96 ~ 97쪽)의 3연이다. 시인 정우영은 해설 「어둠속의 불빛 한점」에서 시인의 시를 ‘민중서정시’라 이름 하였다. 3부에 나뉘어 실린 45편의 시적 정서는 가난과 고독이 주조를 이루었다. 시인은 코피를 쏟으며 개당 50원짜리 실밥따기에 매달렸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색인교정 아르바이트 4만원 짜리로 286 컴퓨터를 사 시를 썼다. 보잘것없는 원고료로 공과금을 내고, 밥을 사고, 월세를 내며 나이 먹어 야간대학에 다녔다.

이원규 시인의 여행에세이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와 시집을 같이 잡았다. 나는 시집을 휴대하며 자투리 시간에 간간히 펼쳤다. 에세이는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달마산 아래 깃들어 사는 김태정 시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세이(2011년 출판)에서 시인은 많이 아팠다. 골수 깊숙이 암세포가 번진 상태였다. 시인은 2003년 달마산 미황사와 인연을 맺었고, 절아래 마을에서 홀로 병과 씨름하며 외롭게 살았다. 「미황사(美黃寺)」, 「달마의 뒤란」, 「동백꽃 피는 해우소」, 「해남시외버스터미널」,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어란, 리미」, 「서정저수지」 등 시인이 가장 행복했던 한 때의 시절이 그려졌다.

내가 잡은 시집은 초판 4쇄로 2015년 3월 16일에 발행되었다. 초판 1쇄는 2004년 7월 30일에 나왔다. 시인이 서울을 떠나 해남 땅끝마을에 정착한 다음해였다. 1991년 『사상문예운동』으로 등단한 시인은 13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그리고 고작 마흔여덟에 생의 끈을 놓았다. 한 권의 시집을 내고 이른 나이에 먼 길을 떠난 시인 김. 태. 정. 요즘 잡는 시와 글에서 이상하게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었다. 박진성의 「이상한 가을」, 김주대의 「한 소식」, 안상학의 「어느 물푸레나무 시인의 죽음」, 김사인의 「김태정」 등. 마지막은 시집의 표제를 따온 시 「물푸레나무」(28 ~ 29쪽)의 일부분이다.

 

물푸레나무는 / 물에 담근 가지가 /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 물푸레나무라지요 /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 그건 잘 모르겠지만 /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 다 되도록 /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 그 파르스름한 빛이 보고 싶습니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번의 자화상  (0) 2016.03.04
자본론 공부  (0) 2016.03.02
멀리 나는 새는 집이 따로 없다  (0) 2016.02.24
비의 목록  (0) 2016.02.22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0) 2016.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