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노동의 새벽

대빈창 2016. 3. 15. 07:00

 

 

책이름 :노동의 새벽

지은이 : 박노해

펴낸곳 : 느린걸음

 

아! 어느새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나. 89년 나는 안산으로 향했다. 고잔동 빌라 지하방에 간단한 이삿짐꾸러미를 내렸다. 이부자리를 펼치자 몇 권의 책이 방바닥에 쏟아졌다. 『풀빛판화시선5 - 노동의 새벽』 남색표지에 민중판화가 故 오윤의 그림이 장식됐다. 선 굵은 목판화로 새긴 고뇌하는 노동자의 얼굴이었다. 마지막 학기가 끝나가던 그해 겨울 나는 공단 화공약품 공장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공장노동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오늘도 공단거리 찾아 헤맨다마는 / 검붉은 노을이 서울 하늘 뒤덮을 때까지 / 찾아 헤맨다마는 / 없구나 없구나 / 스물일곱 이 한목숨 / 밥 벌 자리 하나 없구나

토큰 한 개 달랑, 포장마차 막소주잔에 가슴 적시고 / 뿌리 없는 웃음 흐르는 아스팔트 위를 / 반짝이는 조명불빛 사이로 / 허청허청 / 실업자로 걷는구나

10년 걸려 목메인 기름밥에 / 나의 노동은 일당 4,000원 / 오색영롱한 쇼윈도엔 온통 바겐세일 나붙고 / 지하도 옷장수 500원짜리 쉰 목청이 잦아들고 / 내 손목 이끄는 밤꽃의 하이얀 미소도 / 50% 바겐세일이구나

에라 씨팔, / 나도 바겐세일이다 / 3,500원도 좋고 3,000원도 좋으니 팔려가라 / 바겐세일로 바겐세일로 / 다만, / 내 이 슬픔도 절망도 분노까지 함께 사야 돼!

 

「바겐세일」(75 ~ 76쪽)의 전문이다. 이후 나의 족적은 가리봉 벌통방을 거쳐 개봉동 화랑빌라 지하방, 햇볕 한 올 들지 않던 검단의 쪽방에서 고된 몸을 누였다. 나는 문래동 마찌꼬바의 기름밥 견습공, 부평공단 악기공장의 나무 켜는 전기톱 조수로 밥을 샀다. 4년여 공장노동자의 마지막은 대형건설업체 직업훈련원 훈련생이었다. 93년 여름 한복판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병원생활 3개월만에 패잔병 몰골이 되어 시골로 낙향했다.

30주년 개정판의 표지는 푸른색이다. 나의 눈에 노동복 또는 새벽의 엷은 어스름으로 보였다. 문학평론가 故 채광석의 해설 「노동현장의 눈동자」가 반가웠다. 필히 〈민중〉이라는 접두사가 붙어야 어울리는 평론가였다. 1987년 7월 12일. 이 땅의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자각하고 고성을 울리기 시작하던 그 시각. 평론가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평론가는 시인이면서 ‘풀빛판화시선’을 기획한 출판운동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평론가는 노동자시인 박노해를 발굴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 한 토막. 1984년 그해. 27살 청년 노동자의 손에서 문학평론가의 손으로 신문지가 건네졌다. 신문지 틈새에서 반투명한 습자지에 연필로 또박또박 눌러 쓴 시들이 쏟아져 나왔다. ‘얼굴 없는 시인’의 『노동의 새벽』은 이렇게 탄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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