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밤에 쓰는 편지

대빈창 2016. 6. 27. 07:00

 

 

책이름 : 밤에 쓰는 편지

지은이 : 김사인

펴낸곳 : 문학동네

 

나는 시인을 평론집 『박상륭 깊이 읽기』의 엮은이로 처음 만났다. 어느 환경단체 사이트를 기웃거리다 게시판에 올려진 시가 눈에 들어왔다.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찾았다.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가 막 나왔다. 나는 두 권의 시집을 읍내서점에 부탁했다. 묵은 시집을 잡고 따끈따끈한 시집은 아꼈다. 책장 한 구석에 책등을 보이며 얌전히 자리 잡은 시집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푸근했다. 첫 시집 『밤에 쓰는 편지』는 품절 딱지가 붙었다. 반갑게 부스럼이 떨어졌다. 나는 부리나케 새 판을 찍어 낸 개정판을 손에 넣었다. 4부에 나뉘어 71 시편이 실렸고, 발문은 시인 이문재의 「저 순하여 무서운 웃음」 이다. 발문의 한 대목이다. “김사인은 게으르다.” 그렇다. 시인은 1981년에 등단했다. 첫 시집을 1987년에 상재했다. 두 번째 시집은 19년 만에 나왔다. 그리고 세 번째 시집은 9년 만에 빛을 보았다. 시업 35년에 시집은 세 권 뿐이다.

80년대를 건너 온 나에게 시인은 『노동해방문학』발행인으로 각인되었다. 시인은 긴급조치·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세 번의 감옥살이와 고난의 수배생활을 겪었다. 시인의 고향은 충북 보은 회남으로 대청호 수몰지였다. 첫 시집은 고향에 대한 시인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많이 묻어났다. 시편들은 작고 가녀리고 애달프고 서러운 것들에 시선이 닿았다. 시골길을 혼자 걸어가는 가난한 소년의 맑은 웃음을 그린 「옥동의 한 아이에게」(26 ~ 27쪽)의 1연이다.

 

춥지 않느냐 / 외진 신작로 마른 먼지길 / 오똑하게 혼자서 가고 있는 아이야 / 해진 팔꿈치와 옷소매 / 쩍쩍 터 갈라진 네 조그만 주먹을 보며 / 꼬옥 움켜쥔 낡은 책가방을 보며 / 내 가슴은 사정없이 무너지는데 / 코끝에 성가신 콧물을 문지르며 / 씩 웃는 네 얼굴은 말 못 할 맑음으로 눈부시다

 

등에 멘 책보자기를 연신 추스르며 한들고개(白石峴) 신작로를 걸어 집에 오는 어린 나를 떠올렸다. 신작로 플라타너스 가로수 잎들이 살랑 바람에 뒤집어지며 은빛을 너울거렸다. 기차표 검정고무신 밖으로 드러난 발등은 미끄덩거리는 땀과 신작로 먼지로 시커멓다. 무릎이 툭 튀어나온 바지는 기운 땜방 투성이다. 어깨띠기 런닝구는 땀에 흠뻑 젓었다. 입은 무엇인가를 우물우물 씹었다. 호주머니 젖칼로 길가 밭의 감자나 무를 벗겨 허기진 뱃속을 채웠다. 당번이 돌아오는 날은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였다. 손바닥만 한 옥수수 빵이 두 개씩 차례졌다. 여학생이 볼까 벤또를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도시락 반찬은 짠지의 물기를 짜 고춧가루에 버무린 것이 전부였다. 햄이나 계란프라이를 내놓는 읍내 아이들이 부러웠다. 점심시간 집으로 뛰어와 밥을 급하게 우겨넣고 다시 학교로 뛰어갔다. 나는 5학년이 돼서야 처음 책가방과 운동화를 구경했다. 4학년까지 책보자기를 등에 멨다. 신발은 사시사철 검정고무신이었다. 어머니는 시골 다락방에 나의 국민학교 시절 가난한 유물들을 알뜰하게 보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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