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시 7

환한 저녁

책이름 : 환한 저녁지은이 : 고증식펴낸곳 : 실천문학사 홀로 여기 세워두고 흘러가버린 사랑아 / 오늘 난 변하지 않는 네 향기를 맡는다 / 오래된 자리에 앉아 / 차오르면서  ‘옛사랑을 만나다’(115쪽)의 2연이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주말을 맞아 하릴없던 나는 사람 구경하러 선창가를 배회했다. 더위를 피해 섬을 찾은 사람들이 배낭을 둘러맨 채 배터를 서성거렸다. 피서객을 나를 요량으로 여객선도 3회로 증편되었다. 배는 정박할 여유도 없이 섬에 손님들을 내리고, 섬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태우고 바로 선창을 떠났다. 작렬하는 태양아래 바다는 옥빛으로 파랗다. 물량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속에서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가녀린 몸피의 그녀는 갓난애를 등에 업고, 대여섯살짜리 계집애를 한 ..

흙의 경전

책이름 : 흙의 경전지은이 : 홍일선펴낸곳 : 화남 어머니 / 이화명충 여뀌 독새풀보다도 더 무서운 게 / 암보다 더 무서운 게 / 머리 검은 인종들이었다고 / 손주들에게 일러주는 것이 / 큰 죄 짓는 것 같다며 안쓰러워하던 어머니  ‘어머니 발자욱 소리에 벼 익어가다’(22 ~ 23쪽)의 부분이다. 이 시집은 5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 3부까지 43편은 농업, 농민, 농촌, 흙, 대지, 대자연에 대한 서정시 43편이 실렸다. 4부의 연작시 3편은 근대화,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수탈당하는 농민의 애환을 그렸고, 5부 장편서사시 ‘聖시화호’는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막무가내 린치에 시달리는 이 땅의 가엾은 생명들을 노래했다. 시집을 읽어 나가면서 나의 눈길은 1부에서 시인이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글 시편..

메나리아리랑

책이름 : 메나리 아리랑지은이 : 안용산펴낸곳 : 실천문학사 일제강점기·해방정국 ; 임화, 오장환, 이용악, 백석, 이육사1960 ~ 70년대 ; 김수영, 신동문, 신동엽1970년대 ; 신경림, 정회성, 이시영, 김준태1980년대 ; 박영근, 박노해, 백무산, 김남주, 김용택, 고재종1990년대 ; 유용주, 공광규, 서정홍, 박형진, 이중기, 송경동  이 땅 현대문학사의 노동·농민시인을 거칠게 나열했다. 책읽기를 즐겨했지만 시집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의 독서여정에서 그나마 몇 편의 시로 인연을 맺었던 시인들이다. 근래 어느 시집을 잡다가 해설에 실린 1980 ~ 90년대의 농민시집 일곱 권을 손에 넣었다. 실천문학의 시집이 네 권이었다. 그렇다. 혁명과 시의 시대인 80년대 내내 노동과 농촌의 삶의 현장에..

날랜 사랑

책이름 : 날랜 사랑 지은이 : 고재종 펴낸곳 : 창비 얼음 풀린 냇가 /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 은피라미떼 보아라 / 산란기 맞아 / 얼마나 좋으면 / 혼인색으로 몸담장까지 하고서 /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 발딱 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살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표제작 ‘날랜 사랑(11쪽)’의 전문이다. 깨끗한 물에 알을 낳으려는 본능으로 세찬 여울을 타고 넘는 피라미 떼를 그린 절창이다. 쏟아지는 봄 햇살 속에서 튀어 오르는 피라미의 생명력은 얼마나 눈이 부신가. 참새, 피죽새, 장끼, 까치, 은피라미, 조선소, 엉머구리, 고양이, 뱁세, 토끼, 개, 까투리, 붉은머리오목눈이, 청딱따..

그 남자의 손

책이름 : 그 남자의 손지은이 : 정낙추펴낸곳 : 애지 처녀 적에 내 조개가 일찌감치 눈 뜬 걸 눈치 채고 / 그 인간이 살살 꼬드겨서 얼른 팔았지 / 그랬더니 평생 지지리 속만 썩인 덕에 / 내 궁둥이가 이렇게 앉은 못 박혔어 / 그 저 女子는 조개를 잘 팔아야지 / 잘못 팔면 요 모양 요 꼴 난다고 연신 떠드는 입 / 비리기가 안흥 항구 앞바다요 / 걸기가 풀 두엄 더미다  ‘조개 까는 女子(36 ~ 37쪽)’의 3연이다. 그렇다. 이 시다. 나는 유용주 시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낙추 시의 짧은 시평인 ‘아내에게 받치는 노래’에는 두 편의 시 ‘지게’와 ‘아내’만 실렸다. 도대체 나의 기억은 어디에서 엉킨 것일까. 아무튼 나는 농부 시인의 첫 시집을..

전원시편

책이름 : 전원시편지은이 : 고은펴낸곳 : 민음사 나이가 들면서 시집에 자주 손이 갔다. 근년 들어 100여권의 시집을 손에 넣었다. 시집을 손에 넣기까지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당연히 창작과비평 영인본과 무크지로 출간되던 창비의 몫이 크다. 87년 국민대항쟁. 박종철과 이한열. 두 젊음의 죽음으로 촉발된 한국의 민주화운동. 80년대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민족·민중문학 운동의 중심에 시인 고은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불가에 귀의했다 환속하여 문단에 등단해 새로운 경지를 열어 젖혔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이끌면서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대표적인 참여시인은 창비를 통해 나의 눈에 익었다. 2000년대 들어 시인 고은은 해마다 노벨문학상 ..

쪽빛 문장

책이름 : 쪽빛 문장지은이 : 고재종펴낸곳 : 문학사상사 시인 고재종은 1984년 '동구밖집 열두 식구'로 실천문학사를 통해 등단한 중견시인이다. 현재까지 7권의 시집과 2권의 산문집을 내 놓았다. 가난하지만 현실에 꼿꼿하게 맞서는 건강한 농민들을 그린 농민시와 자연 만물에서 우주를 읽는 생태시의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나와의 인연은 이렇게 늦께야 만났다. 시와는 거리가 먼 무딘 감수성이지만, 80년대와 90년대 초 가뭄에 콩나듯 나의 손에 잡힌 시집은 노동시편이었다. 박노해의 '새벽의 노동',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등 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손에 넣은 농민시편은 신경림, 김용택, 박형진 등 이었다. 독학으로 자기 시세계를 개척한 농민시인 고재종을 익히 귀동냥했으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