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전원시편
지은이 : 고은
펴낸곳 : 민음사
나이가 들면서 시집에 자주 손이 갔다. 근년 들어 100여권의 시집을 손에 넣었다. 시집을 손에 넣기까지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당연히 창작과비평 영인본과 무크지로 출간되던 창비의 몫이 크다. 87년 국민대항쟁. 박종철과 이한열. 두 젊음의 죽음으로 촉발된 한국의 민주화운동. 80년대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민족·민중문학 운동의 중심에 시인 고은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불가에 귀의했다 환속하여 문단에 등단해 새로운 경지를 열어 젖혔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이끌면서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대표적인 참여시인은 창비를 통해 나의 눈에 익었다. 2000년대 들어 시인 고은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어 한국문학의 위상을 드높였다. 시인 친구 함민복의 ‘절하고 싶다’를 들썩이다 짧은 시를 만났다.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시가 실린 시집을 물었다. ‘저녁 무렵’이 실린 ‘시여 날아가라’는 아쉽게도 절판되었다. 도대체 시인의 시집이 책장에 한 권도 없다니. 미안했다.
시인의 대표시선집 ‘마치 잔칫날처럼’을 시장바구니에 넣었으나, 며칠 뒤 짧은 시선집인 ‘순간의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선시집인 ‘뭐냐’와 ‘전원시편’ 3권을 택배로 받았다. 이 시집은 민음사에서 펴낸 ‘민음의 시’ 시리즈의 첫 권으로서 1986년에 초판이 나왔고, 2007년에 재출간되었다. 1984년 11월부터 신동아에 1년간 연재됐던 시들이 묶였는데, 모두 12부에 128편과 문학평론가 최원식의 해설 ‘일이 결코 기쁨인 나라’가 실렸다. 이 시집은 시인이 바람 같은 독신의 서울 생활을 청산한 후 경기 안성으로 낙향한 후 새로운 둥지를 틀고 농민들과 친교에서 얻어진 농업·농촌·농민시다. 시편들은 가을 → 겨울 → 봄 → 여름 계절 순서로 차례 졌는데, ‘농경 생활의 주기를 따름으로써 오늘날 우리 농촌의 실상을 하나의 엄정한 현실’로 드러냈다. 시인은 ‘농민의 희생 위에 강행된 급격한 산업화 정책에 의해 파괴된 농촌의 실상을 절실하게 형상화(301쪽)’ 했다. 이 시집이 얼굴을 내민 지가 벌써 30년이 다 되었다. 그때만 해도 이 땅의 농민수가 8백만에 달했는데, 지금은 3백만에도 못 미친다. 그 시절 모내기와 벼베기는 품앗이로 그럭저럭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농촌에서 젊은이는 눈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다. 아기 울음소리가 그친 적막한 시골학교는 전부 폐교가 될 지경이다. 이제 모내기와 벼베기는 이앙기와 콤바인 차지다. 예순·일흔 먹은 노인들이 뼈 빠지게 농사지어 도시의 젊은이들 스무명을 먹여 살리는 몰골이다. 23%의 식량자급율을 자랑하는 현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협잡꾼들은 FTA를 몰아 부쳤다. 빛 독촉에 견디지 못한 농민이 하루 평균 3명 농약을 먹고 목숨을 버렸다. 십수년 래 이 땅의 농(農)은 도시인들의 취미농으로 전락할 것이다. 시집의 ‘머리 노래’를 옮긴다. 가슴 한 구석이 미어터졌다.
내 원시 조선과 부여 이래
몇천 년 세월 살고 죽어
이 땅의 선은 오로지 농사꾼이었습니다
온갖 악 넘나들었건만
이슬 밟고
별 밟고
한 톨 쌀 내 새끼로 심어서
조상으로 거두는 농사꾼이었습니다
오 한 겨를 거짓 없음이며
몇천 년 뒤 오늘일지라도
이 땅에서 끝까지 내 나라는 농사꾼입니다
들 가득히 가을이건대 울음이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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