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초가집이 있던 마을
지은이 : 권정생
그린이 : 홍성담
펴낸곳 : 분도출판사
낯설다. 출판사의 주소지가 경북 칠곡 왜관이다. 25여 년 전 나의 대학 신입생 시절. 김지하의 ‘밥’이 분도에서 출간되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될 뿐이다. 나의 뇌리에서 지워졌던 출판사가 먼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나의 손에 잡혔다. 그렇다. 가톨릭 서적 전문출판사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운영한다. 표지 그림이 낯익다. 홍성담의 유화다. 나의 세대를 일러 흔히 ‘광주항쟁’ 세대라 이른다. 홍성담은 80년대 오윤, 이철수와 함께 3대 목판화가로 사랑 받았다. 광주 항쟁과 민중화가하면 바로 홍성담이 떠오를 정도로 그는 광주 5월의 인물이었다. 그는 ‘80년 광주’ 한 가운데 서 있었다. 항쟁지도부의 문화선전대로 화가는 포스터, 플래카드, 대자보를 제작했다. 투사 화가는 삐뚤어진 세상을 향해 ‘광주 정신’으로 끝없이 몸을 부딪혔다. 89년 화가는 평양축전에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슬라이드를 보내 국보법으로 수감되었다. 그의 양심은 모진 고문과 장기 투옥으로 점철되었다.
권정생 선생이 안 계셨다면 이 땅의 어린이 문학은 얼마나 가난했을까. 선생이 떠나가신 지 벌써 6주년이 되었다. 이 소설은 갑자기 터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동무를 잃고 힘들게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고통과 상처를 그렸다. 그래서 ‘몽실언니’와 ‘점득이네’와 더불어 권정생 선생의 한국전쟁 소년소녀 소설 3부작으로 꼽힌다. ‘종갑이는 동그랗고 납작한 통조림 한 개를 용하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운 좋게 떨어진 과자 봉지를 또 주웠다. 가슴 안이 온통 방망이질했다.(171쪽)’ 종갑이는 엄마·아빠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국민학교 1학년이다. 피난 중에 할머니는 병들어 돌아가시고, 종갑이와 할아버지만 고향집에 돌아왔다. 학교가 파하고 종갑이는 동무와 함께 전쟁 중 파괴된 다리를 복구하는 공사현장에 따라 나섰다. 미군병사가 던져주는 군것질 거리를 할아버지께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통조림과 과자에 정신이 팔린 종갑이를 브레이크 고장 난 미군트럭이 뒷걸음질로 덮쳤다. 종갑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손자를 뒷산 골짜기에 묻고, 목 메 자살했다.
이 장면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국민학교 2학년, 어릴 적 기억 한 토막을 떠 올렸다. 겨울 방학이었다. 마을 앞 텅 빈 벌판에서 한미군사합동훈련이 한창이었다. 나는 동무들과 떼 지어 들녘으로 앞 다투어 달려갔다. 초콜릿이나 껌 나부랭이를 얻기 위해 우리는 미군들께 되지도 않는 코쟁이 말을 씨부렁거리며 아부를 떨었다. 벌판은 군용헬기가 일으키는 프로펠러 바람으로 짚 낟가리가 흩어지고 짚풀이 공중에 날아올랐다. 그때 흑인 병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도대체 이게 웬 횡재인가.’ 나의 손에는 길쭉한 깡통이 쥐어졌다. 갑자기 깡통 아가리가 노란 연기를 꾸역꾸역 뱉어냈다. 놀란 나는 깡통을 집어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흑인 병사의 웃음소리가 둿통수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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