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환한 저녁

대빈창 2014. 7. 18. 07:16

 

 

책이름 : 환한 저녁

지은이 : 고증식

펴낸곳 : 실천문학사

 

홀로 여기 세워두고 흘러가버린 사랑아 / 오늘 난 변하지 않는 네 향기를 맡는다 / 오래된 자리에 앉아 / 차오르면서

 

‘옛사랑을 만나다’(115쪽)의 2연이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주말을 맞아 하릴없던 나는 사람 구경하러 선창가를 배회했다. 더위를 피해 섬을 찾은 사람들이 배낭을 둘러맨 채 배터를 서성거렸다. 피서객을 나를 요량으로 여객선도 3회로 증편되었다. 배는 정박할 여유도 없이 섬에 손님들을 내리고, 섬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태우고 바로 선창을 떠났다. 작렬하는 태양아래 바다는 옥빛으로 파랗다. 물량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속에서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가녀린 몸피의 그녀는 갓난애를 등에 업고, 대여섯살짜리 계집애를 한 손에 달았다. 사내의 양손에 들린 야영장비가 무거워보였다. 나의 말투는 어눌했다.

 

“안녕하세요. 피서 오셨나봐요.”

“아. 네 ······.”

 

그녀의 놀란 눈이 커졌다. 그녀가 수줍어했다. 10여년 저쪽의 세월. 고려궁지를 오르는 돌계단이 보이는 언덕길가에 작은 서점이 있었다. ○ ○ ○. 이상하게 상호가 서점이 아니었다. 한쪽 벽면을 채운 중고교 참고서를 등뒤로 그녀는 턱을 괴고 무슨 생각에 빠져들었을까. 왜소한 몸피와 갸름한 얼굴에 턱선이 도도하고 투명한 피부는 한 떨기 백합을 연상시켰다. 나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전화를 넣어 책을 주문했다. 거의 일주일을 기다려 책을 손에 넣는 날이 데이트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미술학도로 군복무중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여렸다. 반년이 흘렀다. 어느날 그녀는 서점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알려왔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혼자 마시는 술은 / 빨리 취해서 좋다

(······)

허청거리며 혼자 걷는 밤길에 / 가득

 

‘혼자 마시는 술’(17쪽)의 부분이다. 그녀가 서점을 그만두는 날 비가 몹시 쏟아졌다. 나는 서글퍼서 혼자 술을 마셨다. 흥건한 빗물을 따라 기름띠가 가로등 불빛에 드러났다. 읍내를 뜨는 막차가 들어섰다. 퍼붓는 빗줄기속에 나는 서 있었고 그녀는 창문을 연 채 나에게 들어가라고 연신 손짓했다.

 

메나리 아리랑, 흙의 경전, 어떤 청혼. 환한 저녁. 묵은 농촌시집을 연달아 잡았다. 15여 년 저쪽의 시집을 잡으면서 그 시절 마음을 달뜨게 했던 서점 아가씨가 떠올랐다. 시집은 5부에 나뉘어 80편이 실렸고, 해설은 시인 이은봉의 ‘고향의 마음, 조화와 일치의 삶 - 고증식의 시세계 -'다. 표제작 '환한 저녁'(22쪽)이 오랜동안 가슴 한 구석에 머물렀다.

 

노을을 물고 / 멧새 한 마리 돌아오자

나뭇가지 잠시 몸을 뒤척여 / 귀가를 맞는다

노을진 자리마다 /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 노오란 산수유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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