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포도 눈물
지은이 : 류기봉
펴낸곳 : 호미
이제 그만! / 멈추어 달라고, / 들풀들이 일제히 흐느낀다.
오늘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기로 했다.
‘들풀들의 데모’(48쪽)의 전문이다. 시인은 1994년 여름, 여느 해처럼 잡초를 죽이려 제초제를 뿌리다 들풀들의 고통스런 신음을 들었다. 이후 농부 시인은 유기농으로 포도를 가꾸기 시작했다. 경기 남양주 진전읍 장현리 산 97번지가 시인의 포도밭이다. 3천평 규모의 포도밭에는 1천 100여 그루의 포도나무가 자리 잡았다. 말이 좋아서 자연·그린·문화농법이지 화학비료와 농약을 뿌리는 관행농법의 몇 곱절 힘이 드는 유기농은 농부들이 골병 들 만큼 힘들었다. 시인은 농약대신 방가지똥 같은 독풀을 흑설탕에 발효시켜 병해충 방제를 하고, 바닷물을 나무에 뿌리기도 했다. 나무에 미네랄을 공급해주기 위해서였다.
채소나 과수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농부가 부지런해야 제대로 된 수확을 할 수 있다. 마켓에서 예쁘게 포장된 포도의 봉지를 벗겨 냉큼 포도 알만 입에 넣고 껍질과 씨를 버리는 도시인들은 포도 농사의 고됨을 알 수 없다. 8년 전 내가 주문도에 처음 왔을 때 섬에 600평의 포도밭이 있었다. 포도과원은 대빈창 해변을 등진 나즈막한 산자락 한 귀퉁이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젊은이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허리 꼬부라진 노인네들이 텃밭이나 일구는 섬 사정으로 포도농사를 벼농사와 병행한다는 것은 큰 무리였다. 꽃샘추위의 매서운 삭풍을 맞으며 나무 하나하나 일일이 손톱으로 껍질을 벗겼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 파고 든 해충의 알을 제거하기 위해 석회유황합제를 도포하기 위해서다. 부지깽이 손도 빌린다는 못자리와 모내기철이면 포도밭도 순지르기, 포도알까기 등 사람 손을 부쩍 탄다. 3년을 너덜포도만 수확하여 애꿎은 포도주만 담그던 밭주인은 포도나무를 캐내고, 일손이 덜 가는 고구마를 심었다.
이 책은 유기농으로 포도 농사를 짓는 농부시인의 시선집이다. 포도농사 관련 27 시편과 산문 1편 그리고 생태시인 이문재의 해설 ‘포도가 쓴 시, 시가 키운 포도’가 실렸다. 시집을 꾸미는데 꽤나 정성을 기울였다. 153*225의 신국판 장정의 표지는 동판화로 보였다. 문양은 덩굴손, 포도 잎사귀, 포도송이, 포도 줄기가 장식했다. 시편들 군데군데 실린 사진은 농부시인의 포도밭이다. 미색의 종이 질이 아주 고급스럽다. 열매솎기, 순지르기, 전정, 발효 퇴비, 포도알 까기, 가지치기, 제초 등 포도 농사 과정이 시편들의 제재다. 마지막 시편 ‘눈물 1’, ‘눈물 2’는 한·칠레 FTA 체결로 힘겨워진 포도농사꾼의 한숨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