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 해변 6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5

위 이미지는 보름 전 저녁산책에서 만난 고라니이다. 곧게 뻗은 대빈창 해변 제방에 들어서 반환점 바위벼랑을 향해 걸었다. 고라니 한 마리가 나를 등진 채 제방과 산사면 사이 공터의 풀을 뜯으며 천천히 앞서 걸었다. 다행스럽게 귀가 어두운 녀석인지 눈치 채지 못했다. 바위벼랑 전망대를 오르는 나무계단이 보였다. 앞이 막히고, 그때서야 고라니는 뒤를 돌아보았다. 서향을 바라보는 해변의 일몰 한 시간 전 햇살은 강렬했다.녀석은 눈이 부신 지 잠깐 멈칫했다.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다섯 번째 이미지를 얻었다. 고라니는 예의 날렵한 뜀박질로 아까시 숲으로 사라졌다. 서해의 작은 외딴섬마다 고라니 천국이다. 섬 농부들은 작물의 어린 순을 탐하는 녀석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였다. 고라니들은 언제부터 섬에 자리를 잡았..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햇빛들이 깨어져 모래알이 되고조개들은 그 빛의 알갱이로 집을 지어파도에 마음을 실어 보냈다가다시 불러들이던 섬 밥 묵어라 어둠이 석양 옷자락 뒤에 숨어죄송하게 찾아오는 시간,슬쩍 따라온 별이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 달빛 계곡 꿈을 꾸면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 앞장세워 돌아오듯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여린 삐비꽃을 씹으며애들 소리 사라진 언덕에 앉으면 석양은머리가 하얀 사람들 애벌레처럼 담긴 마당에관절염의 다리를 쉬다 가고빚으로 산 황소가 무릎을 꺾으며경운기 녹슬고 있는 묵전을 쳐다보는 곳그대가 파도 소리에 안겨 젖을 빨던그 작은 섬으로 p.s 전남 완도 출생 시인 김일영의 등단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전문이다. ..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 4

내가 사는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주문도에서 가장 흔하게 눈에 뜨이는 야생동물이 고라니입니다. 고라니는 우제목 사슴과로 몸집이 노루보다 약간 작습니다. 노루와 고라니의 다른 점은 노루의 수컷은 뿔이 있지만 고라니 수컷은 큰 송곳니가 입 밖으로 삐죽 나왔습니다. 고라니 울음은 뼛속까지 울리는 극한의 고통을 나타내는 데시벨입니다. 섬에서 처음 들은 단말마에,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덫이나 올가미에 걸려 죽어가는 고라니였습니다. 무지가 빚어 낸 착각이었습니다. 녀석의 울음은 자기 영역을 침범한 다른 고라니를 쫓아내려는 경고음, 암컷 고라니를 향한 구애 세레나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위협 소리라고 합니다. 산책을 나설 때마다 대여섯 마리가 눈에 띄는 고라니는 믿을 수 없게, IUCN(국제자연보전연맹)의 ..

바다를 여는 사람들

푸른 여명이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물때는 여섯 물이었다. 조개잡이에 나선 대빈창 주민 네 분이 모래밭에서 갯벌로 발을 옮겼다. 그때 경운기 한 대가 뒤따랐다. 그들은 운이 좋았다. 경운기 적재함에 올라탔다. 경운기는 노둣길을 따라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멀리 무인도 분지도 구역에 들어설 것이다. 직선거리 1.5㎞의 갯벌을 걷는 일은 고되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갯벌의 이동수단 경운기를 모는 분은 두세 명이었다. 주민들은 포터 또는 사륜오토바이를 끌고 물때에 맞춰 나왔다. 바위벼랑 나무테크 계단 공터에 주차하고 맨몸으로 갯벌에 들어갔다. 낡은 배낭이 등에 매달렸고, 손에 그레・호미가 쥐어졌다. 무릎장화를 신었다. 토시로 팔목을 묶었다. 챙이 긴 모자로 햇빛을 가렸다. 백합은 이매패류二枚貝類 연체동..

대빈창 해변의 품바

대빈창 해변과 해송 숲을 등지고 주차장에 간이 무대가 들어섰다. 자바라 텐트 무대 앞마당에 차광막으로 지붕을 씌웠다. 큰 북과 사람 키만한 스피커와 노래방 기기가 늘어섰다. 두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간이테이블이 텐트 그늘에 앉았다. 한켠의 음식조리실 현수막은 〈주문도 대빈창 해변 포차〉였다. 돼지껍데기, 무뼈닭발, 메밀야채전, 컵라면, 맥주, 소주······. 계산은 선불이고, 술과 음식은 셀프였다. 주차장 가의 무성한 보리수나무 아래 텐트 대여섯 개가 모여 있었다. 공연 팀의 텐트촌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흩날리는 장마철 빗줄기에 비닐로 지붕을 씌웠다. 탑차가 무대로 향하는 입구에 서있었다. 〈세월따라 노래따라 Live〉 그들의 공연 장면이 차벽을 도배했다. 품바 일행은 보름 전 점심 배로 살꾸지항에 닿..

대빈창 해넘이

세월이 유수와 같습니다. 임인년 범띠 해도 어느새 1/4이 흘러갔습니다. 바다가 크게 부풀었습니다. 물때는 7물(사리)입니다. 무인도 분지도 옆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해무리가 졌습니다. 어른들 말로 내일 비가 올 징조입니다. 서해의 작은 외딴섬 주문도에 삶터를 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실 온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바라볼 수 있는 집” 그렇습니다. 우리집이 자리 잡은 느리 마을은 북향입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슬라브 옥상에서 바라보는 대빈창 해변으로 떨어지는 낙조는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시뻘건 불덩어리가 그대로 바다에 첨벙! 빠져 들어갔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일몰이 가슴을 적신다고 합니다. 인간이 유한적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일까요. 200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