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인연을, 새기다

대빈창 2008. 6. 15. 10:27

 

 

책이름 : 인연을, 새기다

지은이 : 남궁산

펴낸곳 : 오픈하우스

 

온라인 서적에 들어가 미술 서적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찾아 낸 책이다. '인연을, 새기다'라는 표제도 눈길을 끌지만, 저자의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시장바구니에 넣었다. 지금도 나는 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나름대로 판화가 중 세 손가락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작고한 오윤 그리고 이철수, 남궁산을 입에 올렸다. 중국의 신흥목각화 운동에 영향을 받은 80년대의 목판화는 민중의 삶과 투쟁을 선 굵은 판각에 그 의미를 담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시대 판화가 1세대라고 할 수있는 故 오윤의 작품은 그시절 사회과학 서적 표지에 실려 눈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철수는 천등산 박달재에 터를 잡고, 선가(禪家)의 언어방식으로 촌철살인의 짧은 글로 '판화로 시를 쓴다'는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반면 가장 젊은 남궁산은 '생명 판화가'로 불리어질 정도로 일관되게 '생명'이라는 주제에 몰두했다. 그의 작품은 '자연과 계절의 공간 개념을 인간의 생(生)의 모습에 무한히 결합시켜 생명이 잉태된 따듯한 정서'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이 책의 내용은 표제 '인연을, 새기다'가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새기다'는 '장서표(藏書票) 판화'를 가리킨다. 장서표는 책의 소유를 표식하는 도장이 보다 더 예술적으로 가공되어 독립된 예술의 한 장르다. 장서표가 주로 판화(版畵)인 이유는 복수로 제작되기 때문이다. 장서표에는 라틴어 EX-LIBRIS라는 국제공용의 표식이 삽입된다. 사람을 좋아하는 작가 남궁산이, 그가 맺은 인연과 우정의 소중함을 나름대로 기록한 표현방식이 이 책에 등장하는 장서표인 것이다. 인연을 맺은 56명의 표주(票主)가 각 꼭지를 이루니, 개성있는 장서표 56개가 등장한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술잔을 나누고 노래를 섞고 세상사를 논한 저자의 지인들은 장서표 특성상 책을 많이 소유하는 시인, 작가, 학자가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나의 되새김글은 비판적 지식인의 대명사 리영희 선생님과 저자와의 인연을 들추어 본다. 80년대 군사정권하에서 젊은이들의 진실에 대한 갈증은 리영희 선생님이 풀어주셨다. 금서로 판금조치된 선생님의 저서들을 남몰래 숨죽이며 읽었던 책들 중 '전화시대의 논리'가 등장한다. 저자는 선생님의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는 실천적 글쓰기에서 중국 혁명기의 루쉰을 떠올린다. 몇년 전 저자는 여분의 장서표를 병상의 선생님께 보내 드렸다. 선생님은 고마움을 엽서로 표현 하셨는데, 얼마나 몸이 불편하신 지 어린이 글씨 같았다. 서가 한귀퉁이에서 누렇게 바래가는 '전환시대의 논리' 책갈피에 판화가는 그 엽서를 고이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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