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소주 이야기

대빈창 2017. 3. 15. 07:00

 

 

책이름 : 소주 이야기

지은이 : 이지형

펴낸곳 : 살림출판사

 

우리가 소주라고 부르는 술은 사실 소주가 아니었다. 소주(燒酒)는 곡주나 고구마주 따위를 끓여서 얻은 증류식 술로 무색투명하고 알코올 성분이 많다. 여기서 증류(蒸溜)는 액체를 가열하여 생긴 기체를 냉각하여 다시 액체로 만드는 일을 말한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서민의 술 소주(燒酎)는 주정(酒精) - 에틸알코올의 농도를 묽게 만든 희석식소주(稀釋式燒酒)다. 주정을 만드는 원재료는 동남아시아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타피오카(일명 카사바, cassava)다. 이를 발효시켜 만든 강력 알코올(대개 95%)에 물을 들이부은 뒤 다시 감미료를 넣어 만든 소주 맛의 술이다. 그대로 먹을 수 없는 고농도의 에틸알코올을 물에 타 섞은 것이 희석식소주다. 소주 맛을 내는 감미료는 80년대 후반까지 사카린, 이후는 남미아메리카 파라과이가 원산지인 스테비아라는 국화과 식물의 잎에서 추출한 스테비오사이드가 쓰였다. 소주는 주정과 물, 첨가물 세 가지 요소가 단순하게 조합된 상품이었다.

1980년 말부터 출고량에서 막걸리를 제치고 제1의 서민의 술로 자리 잡은 소주는 이 땅에 언제 발을 붙였을까. 독주(毒酒)는 추운 지방의 술이다. 몸 속 피를 잘 돌게 하여 추위를 이겨내는 생활의 지혜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소주 - 증류식 소주로 유명한 개성·안동·제주 소주와 진도 홍주는 몽고와 연관 있다. 몽골군의 증류한 술 ‘아라크’가 소주의 원형이다. 개성은 몽골군 본거지였고, 안동은 몽골군 병참기지였으며, 제주와 진도는 일본 침략을 위한 요새였다. 추운지방의 술 소주는 한반도 북부 지방 사람들이 선호했다. 날이 더운 남부지방 사람들의 술은 막걸리와 약주였다. 한국전쟁으로 남하한 북쪽 사람들의 상실감을 달래 준 것은 다름 아닌 소주였다. 20세기 중반 현대사를 관통한 소주는 피난민의 술이자 실향민의 술이었다. 이 땅의 희석식 소주의 첫 도수는 무려 30도였다. 우리는 이를 막소주라 불렀다. 1996년 알코올 도수의 마지노선이었던 25도가 무너졌다. 지금은 17도까지 떨어졌다.

소주가 등장하는 풍부한 문학적 인용은 독자들의 구미, 아니 술발을 당겼다.

“1년 동안 소주 1,000병 통음.”

시인 고은의 1975년 어느 날 자필 일기의 한 줄이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황석영의 『객지』 그리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와 변영로의 『명정 40년』까지.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젊음은 가투(街鬪)의 화염병과 뒷풀이의 소주로 발산했다. 대학 캠퍼스는 낭만적 객기로 흠벅 젖었다. 그 시절 술내가 진동했던 3대 강의실은 농대, 철학과, 국어국문학과로 기억된다. 야외수업 핑계로 술잔을 돌리며 문학을 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