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대빈창 2017. 3. 20. 07:00

 

 

책이름 :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지은이 : 이성복

펴낸곳 : 문학동네

 

시집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 남해 금산

산문집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시론 - 극지의 시 / 불화하는 말들 / 무한화서

 

책장에서 어깨를 겯은 시인 이성복의 책들이다. 가장 먼저 시집 두 권을 잡았다. 표제가 긴 두 권의 산문집은 2001년에 나왔다. 10년이 지나 아포리즘 모음집만 손에 넣었다. 그리고 2015년 개정판 산문집과 세 권의 시론 세트를 구입했다. 시집 두 권과 산문집 두 권을 펼쳤다. 따끈따끈한 시론 세 권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책은 5부에 나뉘어 31편의 글이 실렸다. 1부는 책에 대한 단상, 동숭동 대학 시절의 추억, 남해 금산과 팔공산 파계사를 찾아가며 시에 대한 사색. 2·3부는 시인의 현미경과 망원경 시선에 잡힌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 제2회 김수영문학상·제4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소감. 4부는 산길·차(車)·골목에서 얻은 단상. 5부는 시인 故 기형도, 소설가 이인성, 문학평론가 故 김현에 대한 기억.

나의 책 읽는 습관은 두 권의 책을 번갈아 펼쳤다. 집에서 딱딱하고 부피가 두꺼운 책을 독서대에 올렸고, 가볍고 손에 잡기 편한 시집이나 구독 잡지는 일상생활에 끼고 다녔다. 익숙한 아침 습관. 화장실 좌변기에 앉아 읽던 산문집을 펼쳤다. 책을 락스가 담긴 말통에 올려놓았다. 책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플라스틱 다라이에 빠졌다. 삼베 베개닛이 다라이 물에 잠겨 있었다. 종이에 물기가 빠르게 번져갔다. 보일러 온돌방이 따듯하다. 젖은 책을 깔린 이불 밑에 넣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고 이불을 들추자 책의 물기는 여전했다. 사무실의 난로가 떠올랐다. 젖은 부분의 책갈피를 펼쳐 열기를 뿜는 연통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를 펼쳤다. 「꿈, 이동, 속도 그리고 활주」(38 ~ 41쪽)의 일부분이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 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석류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우연인가. 나무탄내가 후각을 자극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난로 위 책을 황급히 집어 들었다. 펼쳤던 책갈피 서너 쪽이 가을 낙엽이나 오래전 베어진 그루터기 색으로 변했다. 책은 물에 불고, 불에 타 우글쭈글했다. 나는 산문집을 책장 자기 자리에 모셨다.

〃본질적으로 시는 그에게 헛구역질 같은 것이었다. 토할 수도 없고 억눌러 삼킬 수도 없는 삶,〃(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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