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흰
지은이 : 한강
펴낸곳 : 난다
이시백.최용탁. 전성태. 박민규. 이기호. 내가 편식하는 소설가다. 다섯 분의 장편소설과 소설집은 나의 책장 한 칸을 빼곡하게 채웠다. 최용탁과 전성태는 과작의 작가다. 인기작가 박민규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표절 시비로 2010년 11월 두 권의 소설모음집인 『Double 더블』을 내놓고 두문불출이었다. 이시백과 이기호가 꾸준하게 작품을 출간했다. 그동안 나는 장편소설은 〈세계문학상〉으로. 중·단편 소설은 〈이상문학상〉 수상작 작품집을 통해 문학적 허기를 메워왔다. 변덕인가. 연례행사처럼 연초에 손에 잡았던 두 문학상 작품집에 굿바이를 선언했다. 피치못하게 여성작가와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주민자치센터 대여용 도서에 베스트셀러 두 여성작가의 책들이 눈에 뜨였다.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인 맨 부커상(Man Booker Prize)을 거머쥔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손이 먼저 갔다.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내 심장을 쏴라』로 눈에 익은 작가 정유정의 작품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이 어깨를 겯었다. 근래 장안의 지가를 들썩이게 만든 작가였다. 최근작인 『종의 기원』을 펼쳤다. 도입부터 피와 살이 튀고 선혈이 낭자했다. 지금은 5월이지 않은가. 촛불혁명이 일군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 기대를 부풀렸다. 열다섯 살 소년의 눈으로 본 5월 광주항쟁을 그린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쉬움에 『흰』의 책갈피를 펼쳤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9쪽) 흰 것의 목록은 총 65개의 이야기로 파생되었다. ‘견고해 보이는 기준이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들을 표현’한 사진작가 차미혜의 작품 12컷이 책 속에 담겼다. 얇은 부피의 소설은 산문이나 시(詩)로 읽혀도 무방할 만큼 형식이 낯설었다. 나의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이야기는 「배내옷」과 「수의」 이었다. 작가의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여덟 달 만의 조산으로 두 시간 만에 죽었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 스물 세 살의 엄마는 외딴 집에서 혼자 탯줄을 자르고 딸을 낳고 배내옷을 만들어 입혔다. 아버지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이 남았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한 시간 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배내옷 부분, 21쪽)
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이를?
스무 살 무렵 어느 밤 아버지에게 처음 물었을 때 , 아직 쉰이 되지 않았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수의 부분, 120쪽)
1988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한승원의 「해변의 길손」이었다. 2005년도 수상작은 한강의 「몽고반점」이었다. 아버지와 딸 부녀 2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