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소년이 온다

대빈창 2017. 6. 12. 04:50

 

 

책이름 : 소년이 온다

지은이 : 한강

펴낸곳 : 창비

 

장편소설은 군더더기 없이 문학평론가 백지연, 신형철의 짧은 표사가 뒷표지를 장식했다. 6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된 본문이 전부였다. 각 장을 끌고 가는 화자話者가 달랐다. 1장 「어린 새」는 5·18당시 중학교 3학년으로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을 관리하던 동호. 2장 「검은 숨」은 동호네 문간방에서 여공 누나와 자취하던 동갑내기 정대의 계엄군에게 학살당한 후의 영혼. 3장 「일곱개의 뺨」은 5·18당시 수피아여고 3학년이었던,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소규모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김은숙. 4장 「쇠와 피」는 5·18당시 도청 소회의실 조원 지휘 임무를 맡았던 초등학교 교사가 꿈이었던 스물세 살의 교대 복학생. 5장 「밤의 눈동자」는 방직공장 노조활동으로 해고되어 광주 충장로 양복점 미싱사로 5·18 당시 트럭 스피커 선무방송 임선주. 6장 「꽃 핀 쪽으로」는 동호 어머니의 막내아들에 대한 회상. 에필로그 「눈 덮힌 램프」는 작가 한강의 소설집필 배경.

2014년에 나온 『소년이 온다』는 만 열다섯 살 소년 동호가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의 전남도청 상무관 합동분향소로 쏟아져 들어오는 주검들을 닦고 정리하는, 시신을 태극기로 덮고 시취를 태우려 향에 불을 붙이는 수습장면으로 시작되었다. 동호는 친구 정대가 계엄군의 총격으로 광장에서 비참하게 숨이 끊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소설은 계엄군에 맞선 중학생 동호와 주변 인물들의 처절한 항쟁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 받는 내면을 핍진하게 그렸다. 작가는 무자비한 국가 폭력이 낳은 인간의 잔혹함과 악행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의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레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11 ~ 12쪽)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 넣을 때(121쪽)

삼십 센티 나무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167쪽)

 

작가 한강은 1970년 11월 광주에서 태어났다. 젊은 교사였던 아버지 한승원은 1980년 1월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는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비명횡사했다. 18년의 군부독재가 끝났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신군부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5월 18일 계엄령 불복종 항쟁이 광주에서 일어났다. ‘광주공동체’는 열흘뿐이었다. 탱크와 헬기로 무장한 계엄군이 5월 27일 전남도청을 장악했다. 열흘간 광주는 절대공동체가 유지되었다. 부상자를 살리려 금남로 거리의 여자들이 헌혈에 앞장섰다. 시장의 음식을 서로 나누었다. 무고한 주검이 쌓여가던 도청 상무관에서 날마다 장례를 함께 치루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항쟁 2년 후 1982년. 어린 한강은 아버지가 광주에서 가져 온 사진첩을 보게 되었다. 작가 한승원은 조문하러 광주에 갔다가 유족과 생존자가 비밀리에 만든 사진집을 터미널에서 손에 넣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안방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보이게 뒤집어 꽂아 놓았다. 열두 살의 한강은 몰래 그 책을 펼쳤다. 사진첩의 마지막 페이지 ‘뺨과 목이 총검에 찢긴 채, 비스듬히 한쪽 눈을 뜨고 죽어 있는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어린 예비작가의 가슴에서 소설은 점화되었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 1985), 홍희담의 『깃발』(창비, 2003) 그리고 송기숙, 임철우, 문병란, 김준태, 심상대, 정찬, 정도상 등 수많은 문인들의 5·18을 조명한 시, 소설, 논픽션을 읽었다. 한강의 장편소설은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깨끗한 양심을 지키려 산화한 광주항쟁 시민군과 살아 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절규가 지독하게 아프고 처참했다. 『채식주의자』로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Man Booker Prize)을 수상한 작가 한강에게 국정을 농단한 죗가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는 축전 보내기를 거부했다. 『소년이 온다』로 5·18 광주민중항쟁을 재조명했다는 이유였다. 『소년이 온다』는 2014년 제29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강도 일제에 항거한 만해 한용운의 '민족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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