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충분하다
지은이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옮긴이 : 최성은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꽤 오래전부터 그들에 관해 쓰고 싶었지만, / 워낙 복잡한 주제라 / 계속 훗날로 미뤄왔다. / 어쩌면 나보다 더 뛰어나고, 세상에 관해 더 많이 경탄할 줄 아는 시인에게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시간이 절박하다. 그래서 쓴다.
「마이크로코스모스」(30 ~ 33쪽)의 마지막 연이다. 시인의 12번째 시집 『여기』에 실린 시였다. 86세 고령의 시인은 다음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정했다. 시간은 시인의 생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어판 『충분하다』는 시인의 12번째 시집 『여기』(2009)와 사후에 나온 유고시집 『충분하다』(2012)를 묶었다. 나는 앞서 시인의 시선집 『끝과 시작』을 잡았다. 시인의 1945년부터 2005년까지 출간한 총 열 한권의 정규시집에서 엄선한 시 170편이 수록되었다. 문지에서 출간한 두 권의 책은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폴란드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를 일별할 수 있었다. 시집은 12번째 시집 『여기』의 19편과 유고시집 『충분하다』의 13편, 시인의 마지막 시들 - 육필 원고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본(寫本)들, 리샤르트 크리니츠키(시인, a5 출판사 편집주간)의 「편집 후기를 대신하여」, 옮긴이 최성은의 해설 「"이미 충분합니다"-시인이 건네는 따듯한 작별 인사」, 작가 연보로 구성되었다.
청바지를 입은 아르키메데스가 당신 옆을 지나가고, / 에카테리나 여제가 싸구려 헌옷을 입고 다니고, / 파라오 가운데 누군가는 서류 가방을 든 채, 안경을 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 맨발의 구두장이가 죽고 남겨진 미망인은 / 여전히 소도시에 불과한 바르샤바 태생이고 /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그린 거장은 / 손주들과 함께 동물원을 구경 중, / 털북숭이 반달 족은 / 예술 작품에 심취하기 위해 박물관으로 향하고 있다.
두 번째 시 「부산한 거리에서 나를 엄습한 생각」(16 ~ 18쪽)의 2연이다. ‘시단(詩壇)의 모차르트'라 불리던 시인은 '미사여구나 현학적인 수사 대신 쉽고 단순한 시어로 정곡을 찌르는 언어 감각, 풍자와 아이러니가 결합된 특유의 해학적인 표현’(151 ~ 152쪽)으로 시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을 받았다.
폴란드의 시집은 20여 편의 시를 묶어 출간했다. 유고시집은 눈을 감기 전까지 완성한 13편의 시와 미완성 시 원고 6편이 실렸다. 육필 원고를 촬영한 사진이 실려 시를 완성하기까지 시인의 고민과 흔적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2012년 2월 1일 향년 89세로 떠난 국민시인 쉼보르스카를 폴란드 국민들은 크라쿠프의 코비츠키 국립묘지에 안장시켰다. 번역된 두 권의 책을 잡으면 시인은 평이한 언어로 시를 썼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통찰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시인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출판계 관행을 경멸했다.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상업적인 프로모션이나 대형 출판 이벤트를 벌이는 세태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고수”(176쪽)했다. 이 땅의 출판계는 눈이나 깜짝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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