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분명한 사건

대빈창 2017. 12. 20. 06:23

 

 

책이름 : 분명한 사건

지은이 : 오규원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R〉 시리즈 열한 번째 시집으로 오규원(1941 ~ 2007)의 첫 번째 시집 『분명한 사건』(1971, 한림출판사)이 48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시집은 1968년 등단을 전후한 7년간(1964 ~ 1971) 쓴 시들에서 30편을 추려 1·2부에 15편씩 나뉘어 실었다. 시인이 전등사 소나무에 잠든 뒤 정확히 10주년이 되었다. 시인은 이상, 김수영의 계보를 잇는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서울예대 문학창작과에서 20여 년간 교편을 잡으며 수없이 많은 시인과 작가를 길러 낸 스승이었다. 제자들의 개성을 살려주는 교수법은 신경숙, 황인숙, 함민복, 장석남, 하성란, 조용미, 이원, 박형준, 김언 등 현재 한국 문단의 중견 문인을 길러냈다. 시인은 살아생전 10권의 시집과 4권의 시론집·시 창작 이론서를 비롯 3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시집에서 나의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지점은 시인의 35년간 문우였던 문학평론가 김병익(79)의 발문 「오규원에게 보내는 뒤늦은 감사와 송구」였다. 1970년 〈문학과지성〉이 창간 후 원고료 충당에 애를 먹을 때 대기업 홍보지 편집 책임자였던 시인은 아무 조건 없이 몇 년간 후원금을 냈다. 문지의 초기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이청준)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의 표지 장정을 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표지 둘레를 기본 색 한 가지로 깔아 둘레를 구성하고 가운데에 시인에 따라 고른 색깔을 긴 네모의 틀 안에 바탕으로 하여 시집 표제와 시인의 캐리커처를 넣은’(77쪽) 혁신적인 장정의 포맷도 시인이 처음 만들었다. 어느 날 시인은 문학평론가에게 지나가는 말로 “남산에 가서 당했더니, 몸이 휘청거린다.”고 했다. 1970년대 초 태평양화학의 홍보지 〈향장〉의 편집을 하던 시인은 당시 기자였던 문학평론가의 밥벌이를 위해 잡문 연재를 맡겼다. 해외 독재 권력의 부패를 꼬집은 기자의 글에 뒤가 구린 군사독재 권력은 문제 글의 필자가 아닌 편집자를 끌어다 남산 중정에서 고문했다. 예나 지금이나 독재자들의 비열함은 끝을 몰랐다. 기자를 건들면 동티가 날까, 사보 편집자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마지막은 2부에 실린 「현상실험」의 1연이다.

 

언어는 추억에 / 걸려 있는 / 18세기형의 모자다. / 늘 방황하는 기사 / 아이반호의 / 꿈 많은 말발굽쇠다. / 닳아빠진 인식의 / 길가 / 망명정부의 청사처럼 / 텅 빈 / 상상, 언어는 / 가끔 울리는 / 퇴직한 외교관댁의 / 초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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