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마지막 주말. 2년 만에 마석 모란공원에 발걸음을 했습니다. 절기는 바야흐로 이 땅의 산하를 울창한 신록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의 열사 묘역도 녹음에 둘러싸여 짙은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마음이 무거웠나 봅니다. 전날 저녁 몇 잔 기울인 술에 몸이 늘어졌습니다. 해장국으로 속을 달래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공원 앞 꽃집에서 국화 열 송이를 준비했습니다. 세로로 쓰인 신영복 선생 특유의 연대체 글씨. 가로로 쓰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비석. 〈민주 열사 추모비〉 두 비가 맞아 주었습니다.
전태일(1948 - 1970) / 이소선(1929 - 2011) 노동자의 어머니 /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1918 - 1994)·박용길 장로(1919 - 2011) / 박종철(1965 - 1987) 87년 6월 대항쟁의 도화선이 된 고문치사 / 민주주의자 김근태(1947 - 2011) / 성완희(1959-1988) 탄광노동자 / 노동운동가 박영진(1960 - 1986) / 민주화운동가 박래전(1963 - 1988) / 조영관(1957 - 2007) 시인, 노동운동가 / 조영래(1947 - 1990) 인권변호사
참배를 하는 동안 동선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내 길냥이 한 마리가 앞서 길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오늘따라 뻐꾸기 울음소리가 더욱 구슬프게 들렸습니다. 올해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유다르게 붓꽃이 만발하였습니다.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열사의 성지입니다. 국가폭력에 희생당하거나, 자기 목숨을 던진 열사들이 이곳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민주열사 묘역의 출발이었습니다. 독재 정권은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당시 이곳은 동대문에서 버스가 하루 두 번밖에 없는 오지였습니다. 사람들의 눈과 발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열사들의 유해가 하나 둘 모란공원에 모여 110기가 들어섰습니다.
나는 모란공원 열사 묘역의 마지막 참배를 항상 조영래 변호사 무덤에서 마쳤습니다. 나의 영혼이 이 정도나마 혼탁한 세상을 꿰뚫어볼 수 있게 젊은 시절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전태일 평전』이었습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민청학련 주모자로 몰려, 6년간 수배 상태에서 전태일의 삶을 온전히 복원시켰습니다. 조국은 겨울공화국이었습니다. 출판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떠돌던 원고는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힘들게 세상의 빛을 보았습니다. 조영래 변호사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사건은 1986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입니다. 모두가 기피했던 사건의 변론을 맡아, 밤을 새워 작성한 변론 서문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던 명문이었습니다. 한평생 약자의 편에서 가시밭길을 걸으며,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조영래 변호사. 무덤은 묘역 한 켠에서 조용히 사색에 잠겨있는 듯 했습니다. 묘역을 나서면서 다음 참배에 꼭 찾아 뵙겠다고 두 분을 마음속에 담았습니다.
정기용(1945 - 2011) 건축가, 노무현대통령 봉하 사저
문송면(1973 - 1988) 노동자, 수은중독으로 15살에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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