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릴케 시집

대빈창 2018. 11. 15. 07:00

 

 

책이름 : 릴케 시집

지은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옮긴이 : 송영택

펴낸곳 : 문예출판사

 

‘뜻밖의 우연한 순간에 시 한 편의 첫 단어가 추억의 한가운데서 불쑥 솟아나고 그로부터 시가 시작하는 것이다. 시는 경험이므로 사람은 일생을 두고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시 창작 과정을 어디선가 접했다. 김재혁의 번역으로 고려대학교출판부에서 2006년 초판을 펴낸 『젊은 시인에게 보낸 편지』를 뒤적거렸으나 만나지 못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시인의 일기체 소설인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릴케는 20세기 인상적 시인으로 괴테 이후 독일의 최고 서정 시인이었다.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별 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었고, 김춘수는 「릴케의 시」를 헌정하고, 김수영은 『릴케론』을 외고 다닐 정도였다. 『릴케론』을 쓴 독일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릴케를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이 땅에서 외국 시인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시인의 시집 두 권이 한꺼번에 〈문예출판사〉에서 송영택의 번역으로 나왔다. 시집은 릴케의 시대별 시집 네 권을 묶었다. 동경과 환상, 순수한 사랑을 그린 『첫 시집』 41편. 소녀를 주제로 깊은 직관과 이해력을 보여 준 『초기 시집』의 42편. 초월적 존재를 향한 자기희생을 담은 『시도서(時禱書)』의 43편. 덧없이 변하는 존재의 물질을 벗기고, 존재의 형태를 영원한 것으로 형상화한 『형상 시집』의 40편. 모두 166 시편이 실렸다.

해설은 옮긴이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세계」 였다. 독문학을 전공한 번역가는 시인을 이렇게 평가했다. “체험을 승화하고 삶의 본질, 즉 사랑과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추구하여 인간 실존의 궁극을 철저히 파고들어 밝힘으로써 20세기가 낳은 정상급 시인”(245쪽)이라고. 시집의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소녀 취향의 시집 장정이 눈에 거슬렸다. 속표지는 장밋빛 양장본 하드커버였다. 장미 한 송이가 그려졌고, 시인의 이름을 멋진 흘림체로 휘갈겼다. 시인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속설이 전해지나, 사실은 백혈병으로 죽었다. 표지그림은 클로드 모네의 1873년작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꽃〉이다. 본문에 실린 23점의 그림은 아둔한 나로서 詩와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마지막 시 「끝맺는 시詩」(238쪽)와 한 면을 나눠 가진 그림은 앙리 루소의 1897년 작 〈잠자는 집시〉였다.

 

죽음은 크고도 넓다.

우리는

웃고 있는 그의 입.

우리가 삶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우리의 한가운데서

굳이 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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