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대빈창 2018. 12. 27. 04:53

 

 

책이름 :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지은이 : 서정주

펴낸곳 : 은행나무

 

시선집은 미당(未堂) 서정주(1915 ~ 2000)의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출간되었다. 『화사집』(1941)에서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까지 미당이 70여 년 동안 발표한 15권의 시집에 실린 1천여 편의 작품에서 100편의 시를 골라 한 권에 담았다. 시를 선(選)하고 해설 「영원을 노래하는 떠돌이 시인」을 쓴 이는 윤재웅(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였다. 엮은이는 서정주의 곁을 끝까지 지킨 애제자였다. ‘모국어의 연금술사’,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 ‘한국 서정시의 고고한 정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찬사를 듣는 대시인을 나는 단연코 냉대했다. 이 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남성작가 김훈이 읽어야 할 책으로 첫 손에 꼽은 세권짜리 『미당시전집』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선운사 골째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 작년 것만 오히려 남었습디다. / 그것도 목이 쉬여 남었습디다.

 

「선운사 동구洞口」(95쪽)의 전문이다. 내가 처음 만난 미당의 시였다. 20여 년이 흘렀다. 아직 젊었던 그 시절, 나는 륙색을 메고 부안 내소사와 고창 선운사에 발걸음 내딛었다. 그 흔적을 답사기 「나그네는 파랑새를 보았는가」에 긁적였다. - 선운사에서 미당의 육필원고를 새겨놓은 시비를 만났다. 고창 선운리는 시인의 고향이며 시집 『질마재 신화』의 무대였다. 미당의 시는 경험적 삶의 내용을 형이상학적 질서의 세계로 승화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만 들이대고 시비도 읽지 않은 채 내쳐 걸음을 내디뎠다. 어느 평론가는 미당을 ‘시 쓰는 일에 있어서 백년에 하나 나올까말까 한 인물’로 추앙했지만, 나의 머릿속은 태평양전쟁말기 일본 군국주의의 악명 높은 가미가제특공대를 찬미한 그의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로 들끓고 있었다. 궁금했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도덕적 양심의 상관관계가. -

엮은이는 해설에서 스승을 “그러나 미당은 자신만의 길을 꿋꿋하게 갔으니, 그것이 바로 ‘시인의 길’이었다.”(224쪽)고 말했다. 하지만 내게 미당은 세계관이 병든 기회주의자 시인일 뿐이었다. 미당이 ‘시인의 길’(?)을 걷느라 종천순일(從天順日)했던 하늘과 태양은 일제강점기는 히로히토왕과 천조대신이었다. 해방 후는 이승만(미당이 자서전을 집필)이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였다. 미당은 시대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 종이 주인을 섬겼을 뿐이다. 백석,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이상화, 임화 그리고 김수영, 신동엽, 신동문, 그리고 김남주, 박노해, 백무산······. 어두운 시대에 시인은 더 빛을 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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