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옥동식屋同食의 돼지곰탕

대빈창 2019. 2. 11. 06:34

 

 

2010. 5. 3. 나의 블로그 〈daebinchang〉의 개설일이다. 책 리뷰가 800개, 소소한 일상을 다룬 글 200개, 답사기가 100개를 넘겨 전체 글이 1,200개를 앞두고 있다. Daum 블로그에서 압도적인 분야가 ‘맛집’에 대한 식후 소감이다. 나의 블로그에 전무한 분야다. 오늘 첫 발자국을 띄게 되었다. 서해의 작은 외딴섬에 삶터를 꾸린 얼치기 생태주의자에게 오늘 글은 유일한 맛집 기행이 될 가능성이 크다.

농부시인 고재종의 시집 『쪽빛 문장』을 잡고, 학창시절 학술답사로 들른 시골 5일장에서 맛본 돼지국밥을 떠올렸다. “일제 잔재의 적산가옥이 일렬로 늘어선 시장통 입구에 국밥집이 있었다. 가마솥에서 돼지 내장이 익어가며 물큰내를 풍기고, 김이 자욱한 솥안을 아주머니가 바가지로 휘저었다. 변변한 상호조차 없던 그 집의 돼지국밥 맛을 아둔한 나는 지금도 표현할 수 없다. 끼니를 놓쳐 허기가 몰려오면 나는 국밥집부터 찾았다. 혀끝은 25년전 산촌오지 경북 청송의 허름한 국밥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밥위에 삶은 돼지 내장이 푸짐하게 얹은 펄펄 끊는 투가리가 앉은뱅이 탁자에 탁! 놓였다. 우선 들깨가루를 한숟가락 수북이 떠 어슷하게 썰린 대파와 함께 휘저었다. 매운 다데기는 거품을 일며 끊는 국물에 풀었다. 돼지고기 특유의 잡내를 없애는 방편이었다.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국물과 밥알과 내장을 함께 입안에 넣고, 주먹만한 깍두기를 으적으적 씹어댔다. 풋고추와 마늘과 양파를 집된장에 찍어 입안에 고인 누린내를 씻어냈다. 시골소읍에 한집은 있게 마련인 국밥집에서 한끼를 때우는 사람들의 식사법이었다.

설 연휴, 오랜만에 뭍 외출을 한 나는 서울 합정역 부근의 〔옥동식屋同食〕에서 한끼 식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1시에 오픈하고, 하루 백 그릇을 한정판매하는 맛집은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룬다는 소문이 온라인에 자자했다. 상호는 셰프 이름에서 따왔다. 생김새가 눈길은 끄는 메세나폴리스 건물의 지하에 차를 주차했다. 동행한 L은 걸으면서 카카오내비로 미로 같은 골목을 헤집었다. 가게 앞에 도착하니,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자자한 명성은 어디가고, 골목길은 텅 비었다. 오늘은 까치설날이다. 셰프로 보이는 이가 나왔다. L이 날씨가 추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안되겠냐고 떠보았다. 그가 말했다. 아직 음식준비가 안 끝났다고.

11시 정각. L과 나는 오늘 〔옥동식屋同食〕의 마수걸이 손님이었다. 우리는 출입문에서 등이 보이는 모서리 두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 나타난 것일까. 곧이어 두 명의 손님이 가게에 들어섰으나, 남은 자리는 한 자리였다. 운 좋게 혼밥 손님 한 명이 나타나,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차지했다. 바 형태의 실내는 은은한 조명아래, 출입문에서 옆모습이 보이는 자리까지 고작 열서너 좌석밖에 없었다.

모든 그릇과 수저는 유명한 경기 안성 유기鍮器였다. 놋그릇은 들기에 묵직했다. 어떤 사물이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는데서 나온 ‘안성맞춤’이란 말은 이 그릇에서 유래했다. 메뉴는 한 가지였다. 「돼지곰탕」. 보통 8천원, 특 1만2천원이었다. 잔술 2천원이 눈길을 끌었다. 돼지국밥이 아닌 돼지곰탕이라니. 국밥은 먹을 사람이 많은 경우, 추울 때 뜨겁게 먹기 위한 음식으로 알맞다. 곰탕은 푹 고아서 국물을 낸 탕을 말했다. 우리는 흔히 돼지국밥이라는 음식이 낯익다. 「돼지곰탕」은 셰프의 자부심의 표현일지 몰랐다.

유기 종지에 담긴 것은 국물에 풀어 넣는 다데기가 아닌 고기를 찍어먹은 양념으로 고추지라 불렀다. 자기 종지에 김치를 덜자 기다릴 시간도 없이 돼지곰탕이 앞에 놓였다. 펄펄 끓기는커녕 은은하고 투명한 국물은 황금빛이었다. 미지근한 국물을 한수저 입에 넣었다. 담백하고 깔끔했다. L이 잔술을 주문했다. 보리소주였다. 1/3쯤 입안에 담고 맛을 음미했다. 특유의 향이 고기의 잡내를 잡아준다고 한다. 고추지를 얹은 얇게 저민 돼지고기에 어울리는 술로 궁합이 그만이었다. 토렴(밥이나 국수 따위에 따뜻한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데움)한 밥알이 귤 알갱이처럼 입안에서 탁탁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L이 자신의 그릇에 담긴 돼지고기를 고추지 종지에 담아 내밀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골목길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로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나의 시야에 소금봉지 브랜드가 눈길을 잡았다. 「태안 자염」 충남 태안의 시인 정낙추는 농부면서 소금장수였다. 첫 시집 『그 남자의 손』을 잡으며 시인이 전통소금 자염을 옛 방식대로 복원한 《소금 굽는 사람들》에서 일하는 것을 알았다. 자염은 갯벌 흙을 해풍으로 말린 뒤, 바닷물을 다시 부어 함수鹹水를 만들고, 다시 가마솥에 부어 장작불로 끊이는 힘든 과정을 거쳐 소금을 생산했다. 까다로운 제조 과정으로 3톤의 갯벌 흙으로 80㎏의 소금을 생산하기도 힘들었다. 자염을 만들 수 있는 갯벌은 이 땅에서 오염되지 않은 충남 태안의 ‘낭금 갯벌’이 유일했다. 나는 시집을 잡고, 자염을 맛보고 싶었다. 셰프의 자기 음식에 대한 자부심과 정성 그리고 심혈을 기울인 식재료 선택이 옥동식屋同食의 돼지곰탕 맛을 우려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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