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대빈창해변 가는 언덕위 하얀집

대빈창 2019. 3. 21. 07:00

 

 

외포항에서 오전 9시 10분에 출항한 1항차 객선이 주문도에 닿는 시간은 대략 10시 40분경입니다. 주문도는 조선 후기 임경업 장군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한양의 국왕께 하직인사 글을 올려 주문도(奏文島)라 불렸는데, 지금은 주문도(注文島)로 변했습니다. 배 닿는 시간은 물때에 따라 10여분 경 들쑥날쑥 합니다. 느리 선창에 내린 외지인들의 발걸음은 대부분 대빈창 해변으로 향합니다. ‘느리’는 산부리가 길게 뻗어나가 늘어진 곶(串)이 있는 주문도 선창의 자연부락 마을 입니다. 대빈창(待賓倉)은 옛날 중국 교역의 중간기항지로 중국사신과 상인 등을 영접하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입니다. 느리 선창에서 대빈창 해변으로 가는 길은 도로명 주소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왼쪽은 월파벽 너머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오른쪽은 매표소와 주문도마트, 두 채의 민가를 지나면 야산 절개지가 시작됩니다.

해안도로를 걷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우회전하면 도로명 주소 ‘대빈창길’의 1번지가 시작됩니다. 폭 좁은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다랑구지 논이 나타나고, 다시 삼거리를 만납니다. 대빈창으로 향하는 오른쪽 길은 경사진 언덕길입니다. 언덕 정상 가까이 오른쪽은 서도교회와 낡은 집 한 채, 왼쪽은 봄맞이 도색을 새로 한 슬라브 옥상 집이 나타납니다. 주문도의 가정집은 모두 단독주택입니다. 80년대초 정부보조를 받아, 획일적인 설계도에 따라 20평과 18평집들이 같은 모양으로 지어졌습니다. 대빈창 해변의 바닷모래를 마구 퍼다 지은 집들은 세월의 풍화에 점차 지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섬주민들은 감지덕지했습니다. 외진 곳에 몇 채 남은 옛집은 사람이 어떻게 집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 집니다.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지붕은 낮았고, 발 뻗고 누울 공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말그대로 초가삼간 오두막이었습니다. 느리 마을의 집 덩치가 커지자 할 수없이 저수지 아래에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습니다. ‘꽃동네’입니다. 행정구역 주문2리는 3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대빈창, 느리, 꽃동네.

슬라브 옥상에 태양광집열판이 설치되었습니다. 3kw의 전력을 생산하지만, 시골집 가정용으로 충분히 남아도는 전력은 한전으로 되돌아갑니다. 뒷산은 서도면(西島面)의 최고봉 봉구산(烽丘山, 해발 147m)입니다. 고려말 삼별초가 항쟁 거점을 진도로 옮겨가면서 강화도 진강산 봉수대와 봉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집뒤 경사로가 봉구산 진입로입니다. 봉구산 정상은 흉물스런 기지국 철탑이 들어섰습니다. 뒤울안 계단식 화단에 두 그루의 수국 마른줄기가 보입니다. 텃밭과 살림집을 이어주는 경사면의 건물은 창고입니다. 석축앞 헐벗은 두 그루의 나무는 모과와 매화입니다. 진돗개 ‘느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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