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여 일만에 마석 모란공원에 발걸음을 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일이지만 비가 드문 찔레꽃 피는 절기에 찾게 됩니다. 골안개가 점차 짙어가며 주문도발 삼보12호의 출항이 지체되었습니다. 다행히 대기하던 배가 2시간 만에 움직였습니다. 폭염을 피해 섬을 찾는 피서객들이 강화 외포항에 몰려 들었습니다. 평소 기상악화로 인한 객선의 대기 시간은 1시간이었습니다. 아침 8시가 지나면 오전 1항차는 결항되었고, 오후 2시 2항차만 한 번 운행하였습니다. 밀려 든 외지인들의 악다구니가 초조함에 발만 동동 구르던 저를 살린 셈입니다. 읍내 은행에 둘러 전태일 재단과 인권운동사랑방의 자동이체 후원 계좌를 다시 살렸습니다.
서울 원지동 추모공원을 떠난 장례 행렬은 오후 4시에 민주열사묘역에 도착했습니다. 사상최대 폭염이라는 찜통더위 속에 1천여 명의 인원이 고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 드렸습니다. 가라앉은 마음을 추스르며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하관식을 지켰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주먹을 움켜 쥔 사람들의 땀에 전 와이셔츠가 맨살에 달라붙어 살색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남양주시 모범택시기사들이 자발적으로 혼잡스런 공원 입구의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가슴으로 사회적 약자를 대했던 고인의 겸손한 인생 역정이 묻어나는 정경이었습니다. 노회찬 의원 하관식에 다녀온 지 300여일이 되었습니다. 기일이 오기 전 홀로 묘소를 찾고 싶었습니다. 아침배가 순조롭게 주문도 선창을 떠났습니다.
이소선 / 전태일 / 조영래 / 문익환·박용길 / 박종철 / 김근태 / 계훈제 / 김남식 / 문송면 / 노회찬
故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사저 건축가 정기용(1945 - 2011) 선생의 묘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후원하던 (사)평화박물관추진위원회에서 부고를 받았지만 그때 뵙지 못했습니다. 선생의 묘소는 민주열사묘역에서 떨어진 외딴 구역의 꼭대기에 자리 잡았습니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땀만 흘리며 선생을 뵙지 못하고 민주열사묘역으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위치만 어림짐작할 뿐,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습니다. 문송면(1973 - 1988)은 온도계 제조업체 노동자로,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15세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이 땅에 직업병 문제를 환기시켰습니다. 계훈제(1921 - 1999) 선생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주화·통일운동에 헌신한 재야원로였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젊은이들의 사표가 되셨던 큰어른이셨습니다. 박종철 열사 묘역 앞에 섰습니다. 옆 묘지의 안내판 사진이 눈에 익었습니다. 김남식(1925 - 2005) 선생은 진보적 지식인으로 통일 운동가이셨습니다. 무지몽매한 제가 이만큼이나마 현실 모순에 눈을 뜨게 해 준, 80년대 의식있는 이들에게 필독서였던 『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필자입니다.
노회찬 의원을 처음 만난 곳은 1992년 가리봉 오거리의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 사무실이었습니다. 그 시절 나는 울산 대공장 노동자를 꿈꾸는 문래동 마찌꼬바 견습공이었습니다. 해방정국이후 반세기 만의 합법공간에 진출한 진보세력은 총선에서 무참하게 깨졌습니다. 정당법에 의해 2%의 유권자 지지를 받지 못한 진보정당은 스스로 해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망신창이 몸으로 진보세력은 모든 역량을 모아 대선의 백기완 민중후보를 밀었습니다. 가난했던 동지들은 상계동 백화점 신축현장의 노가다로 적게나마 선거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대선 후 나는 인천 대형건설사 직업훈련원에서 중장비를 배우는 예비 노동자였습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진정추 동지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시골로 낙향해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세월은 25여 년을 훌쩍 건너 띄었습니다.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 둥지를 튼 나는, 찔레꽃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남양주 화도읍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으로 발걸음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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