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오래된 미래'를 만나다.

대빈창 2019. 5. 27. 05:17

 

 

 

'96년 《녹색평론사》에서 한 권이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삽화는 흑백사진이었고, 종이는 재생지로 책갈피가 껄끄러웠습니다. 스웨덴 여성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Ancient Futures : Learning from Ladakh』(Rider, 1992)의 김종철·김태언 공동번역본이었습니다. 우리말 표제는 『오래된 미래』로 환경생태 도서의 바이블로 한국 생태운동의 상징어가 되었습니다. 책은 히말라야 고원의 유서 깊은 공동체인 라다크에 대한 생생한 현장 보고서입니다. 얼치기 생태주의자로서 내가 손꼽은, 생태환경 5대 필독서의 가장 으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위 이미지는 오랜만에 아차도 출장길에 나섰다가 운 좋게 만난 인류의 ‘오래된 미래’  모습이었습니다. 아차도는 0.54㎢의 면적에 20여 가구의 40여명이 사는 작은 섬입니다. 제가 알기로 60세 이하의 섬주민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명절이 되어서야 고향을 찾는 자식들을 기다리며 노인네들이 소일거리로 고구마, 고추, 땅콩 농사를 지으십니다. 아차도의 논 면적은 고작 5000평 정도입니다. 모내기의 진척을 알아보려 근 두 달 만에 아차도에 발걸음을 했습니다. 폭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아차도는 주문도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마을 앞 논들은 묵정논으로 고라니가 새끼를 칠 정도로 잡풀이 우거졌습니다. 다행히 토배기 한 분이 손바닥만한 세 필지에 언제 모내기를 마쳤는지 모를 깁고 있었습니다.

마을 뒷산을 넘으면 무인도 수리봉을 가운데 두고 볼음도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세 필지의 논배미가 숨어 있습니다. 며칠 전 내린 22mm 봄비가 써레질한 논에  흘러들어 논두렁에 물이 찰랑거렸습니다. 고구마 묘를 심던 논 주인이 반겨 맞아 주었습니다. 며칠 뒤 본도에서 모판을 사와 모내기 할 예정입니다. 올해 모판 한 장 값은 3000원입니다. 모판 한 장으로 10평 모내기를 할 수 있습니다. 논이 워낙 외진 곳에 자리 잡아 못자리가 흰뺨검둥오리의 극성에 남아나질 않았습니다. 수풀에 낳은 알이 부화하면 어미는 새끼들을 거느리고 못자리의 여린 모를 헤집었습니다.

아차도 유일의 배수갑문이 설치된 마을 뒤편 바닷가 두 필지의 논 주인은 외지인입니다. 물이 모자라 아직 써레질도 채 못하고 있었습니다. 매년 객선으로 이앙기와 모판을 싣고 섬에 들어와 모내기를 마칩니다. 아차도 선창에 내려 고샅을 지나 수리봉으로 향하는 뒷산 고갯길을 오르다보면 왼쪽에 작은 계곡이 있습니다. 물이 말라 잡초와 관목만 우거졌던 우묵진 지형에 몇 년 전 마을 노인네가 세 필지의 계단식 논을 조성했습니다. 벌판의 논들이 오랜 세월 경작으로 흙이 갈색을 띤 반면, 새로 꾸민 아차도 계곡 논은 황토흙 그대로였습니다.

올해는 봄 가뭄이 심해 노부부는 가장 낮은 논 200평에 모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숙련된 농사꾼이 하루 꼬박 모내기하는 면적이었습니다. 논두렁에 붙여 일정한 간격으로 모를 한 줄로 미리 꽂았습니다. 논두렁의 모포기에 장줄을 맞추고 가장자리에서 가운데로 이동하며 모를 꽂아 나갔습니다. 못자리는 계단논 한 구석에 마련했습니다. 옛날 방식과 다른 점은 못자리에 직접 볍씨를 뿌려, 지푸라기로 모춤을 묶어, 모를 내는 번거로움을 피해 편한모상자에 모를 부었습니다. 노부부는 모판의 가지런한 모를 손아귀에 잡힐 분량만큼 뜯어 장줄 근처에 늘어놓았습니다. 모쟁이가 없는 일손 부족한 현실이 반영된 모내기 방법입니다. 서해의 작은 외딴 섬 아차도의 노부부가 ‘오래된 미래’의 모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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