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담장을 허물다

대빈창 2019. 7. 31. 07:00

 

 

책이름 : 담장을 허물다

지은이 : 공광규

펴낸곳 : 창비

 

강물은 몸에 /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 모래밭은 몸에 /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 새들은 지문 위에 /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 수만 리 비단인데 /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 쇠붙이와 기계 소리에 놀라서 / 파랗게 질린 강.

 

「놀란 강」의 전문이다. 가끔 눈동냥하는 환경단체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 온 시를 접하고 시인을 찾았다.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에 실렸다. 시인의 근간 시집 『파주에게』(실천문학사, 2017)에 잠깐 눈길이 갔으나, 손은 여섯 번째 시집 『담장을 허물다』(2013, 창비)를 집어 들었다. 시집은 제4회 신석정문학상 수상작이었다. 심사위원 정희성 시인은 표제작을 이렇게 평했다. “비워냄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은 소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요즘 우리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6연 26행의 다소 긴 표제시는 2013년 시인·문학평론가 120명이 선정한 최고의 시에 뽑혔다. 시인의 수상 소감이 그럴듯했다. “신석정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으며 지조를 지키셨고 5·16때도 자신만의 저항정신을 보여준 분입니다. 그런 선생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최근 논란이 되는 친일문학상과 비교해 보면 특히 그렇죠.”

시집은 3부에 나뉘어 45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유성호의 「순정하고 투명한 서정을 통한 본원적 존재론」이었다. 불교적 세계관의 무소유를 호탕하게 그려 낸 표제작 「담장을 허물다」가 매력 있었다. 나는 얼치기 생태주의자답게 「병산습지」(15쪽)에 눈길이 한참 머물렀다.

 

 

달뿌리풀이 물별 뜬 강물을 향해 / 뿌리줄기로 열심히 기어가는 습지입니다 / 모래 위로 수달이 꼬리를 끌고 가면서 / 발자국을 꽃잎처럼 찍어놓았네요 / 화선지에 매화를 친 수묵화 한폭입니다 / 햇살이 정성껏 그림을 말리고 있는데 / 검은꼬리제비나비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 앉았다가는 이내 날아갑니다 / 가끔 소나기가 버드나무 잎을 밟고 와서는 / 모래 화선지를 말끔하게 지워놓겠지요 / 그러면 또 수달네 식구들이 꼬리를 끌고 나와서 / 발자국 꽃잎을 다시 찍어놓을 것입니다 / 그런 밤에는 달도 빙긋이 웃겠지요 /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 매화 꽃잎 위에 똥을 싸놓고서는 / 그걸 매화 향이라고 우길 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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