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지은이 : 브레히트·아라공·마야콥스키·하이네
옮긴이 : 김남주
펴낸곳 : 푸른숲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80년대가 저물어갈 즈음 하숙방에 시인의 초창기 시집 두 권이 있었다. 『나의 칼 나의 피』(인동, 1987), 『조국은 하나다』(남풍, 1988). 그 시절 혁명시인은 1979년 10월 초순 남민전 준비위원회 조직원으로 15년형을 언도받고 징역을 살고 있었다. 1987년 6월 대항쟁은 전두환의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4·13 호헌조치에서 불꽃이 튀겼다. 문인협회(이사장 소설가 김동리)는 4·13 호헌조치 지지성명을 냈다. 이 땅의 순수(?) 문학을 추구한다는 이들의 추한 몰골이었다. 치욕적 모멸감에 신문기사와 김남주의 시 「개새끼들」를 확대 복사하여 어둠을 틈타 게시판에 붙였다. 다음날 형사의 탐문이 시작되었다. 급변하는 정국의 소용돌이에서 미미한 돌발사건이었다.
시인은 198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89년 1월 동지였던 박광숙 선생과 결혼했다. 1990년 토일이가 태어났다. 만국의 노동자가 금·토·일을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金土日’로 지었다. 1990년 늦가을, 나는 안산공단으로 향했다. 그 시절 신생도시 안산은 벼 그루터기만 남은 허허벌판에 검은 아스팔트가 뱀처럼 뻗어있었다. 휑한 겨울 벌판에 프라자 건물 두세개가 외로이 서있었다. 홀로 고잔동의 빌라 지하방에 세를 들었다. 공단 내 화공약품 공장노동자로 밥을 샀다. 1994년 2월 혁명시인이 48세로 영면했다. 2월 16일 서대문의 경기대 노천극장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모교인 전남대에서 노제를 지냈다. 시인은 광주 망월 5월 묘역에 영원히 잠드셨다. 그 날은 아주 추웠다. 나는 시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뵙지 못했다. 마음에 오랫동안 짐으로 남았다.
시인의 유고집 두 권을 손에 잡았다. 문학에세이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와 삶과 문학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 책 말미에 15장의 사진이 실렸다. 시인의 살아생전 모습과 영결식 장면, 자필 원고 그리고 영결식장의 엄마 품에 안긴 어린 토일이가 눈에 밟혔다. 90년대 말이었다. 그때 나는 석모도에서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박광숙 선생은 토일이와 강화도 불은 오두리 시골마을에 터를 잡으셨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강화도의 삶을 산문집 『빈 들에 나무를 심다』(푸른숲, 1999)에 담았다. 선생님은 유신정권 시절 1979년 해직되었다. 아이들과 강제로 이별한 지 21년 만인 2000년 3월 복직했다. 2012년 8월 강화 강남중에서 퇴직하셨다.
작년 초겨울이었다. 찬바람 이는 계절이 돌아오면 나만의 연례행사가 있었다. 대기에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시간 주문도를 출항하여 외포항에 닿는 아침 객선에 올랐다. 나의 손에 자연산 굴 반관이 든 플라스틱 통 두 개가 들렸다. 전날 섬 할머니들이 곱은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굴밭에서 좨로 쫀 굴이었다. 작년 겨울은 굴이 귀했다. 오랜 가뭄의 지속으로 인한 담수 부족이라고 했다. 굴이 여물이 못하고 까맣게 폐사되었다. 길상 온수리 여우고개 못 미쳐 소담마을의 함민복 시인집에 들렀다. 거실에 놓인 앉은뱅이 책상에 여러 권의 책이 쌓였다. 맨 위 번역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시집의 표제와 출판사를 메모했다. 섬에 들어가면 온라인 서적에 주문할 생각이었다. 시인이 전화를 넣었다. 선생님이 집에 계셨다. 시인에게 자연산 굴을 선물한지 꽤 세월이 묵었다. 언제부터인가 시인의 손을 통해 선생님께 섬에서 나는 첫 굴을 드렸다. 다행히 토일이는 어머니가 담근 어리굴젓을 좋아한다는 것을 시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시인 손을 통해 담근 매실효소나 한방 간장, 막장을 나에게 주셨다.
낮은 야산아래 깊숙한 마을 안쪽에 집이 있었다. 선생님은 나무나 화초 가꾸기를 즐기셨다. 시인의 부탁으로 자생 강화도 약쑥 몇 뿌리를 건네 일이 생각났다. 선생님이 반갑게 시인과 나를 맞아주었다.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셨을까. 마루에 올라서자 곧바로 내 손에 시인 집에서 보았던 번역시집을 건네셨다. 김토일은 어느새 서른살 장년이 되었다. 토일이의 소식은 함민복 시인을 통해 간간히 들었다. 강화도 전통시장의 ‘청풍상회’는 청년 5명이 운영하는 화덕피자집이었다. 2013년 중소기업청이 공모한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청년창업 프로그램’을 통해 가게를 오픈했다. 토일이와 아직 상면을 못했다. 언제인가 만나게 될 것이다. 손을 잡으며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번역시집은 혁명시인이 옥중에서 감시의 눈을 피해 은박지에 꾹꾹 눌러 쓴 번역시 모음집이었다. 내가 받은 시집은 리커버(기존 책의 표지 디자인을 새롭게 해 재출간된 책) 특별판이었다. 표지 그림은 피에르-조제프 르두테(1759 - 1840)의 1816년 作 〈튤립〉이었다. 시집은 박광숙 선생의 「개정판을 펴내며」와 ‘옮긴이의 말을 대신하며’ 「진실과 순결을 노래한 시인들」,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해설 「순결한 삶, 불꽃같은 언어」그리고 김남주 연보로 구성되었다. 본문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독일, 1898 - 1956)의 39편, 루이 아라공(프랑스, 1897 - 1982)의 17편,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러시아, 1893 - 1930)의 12편, 하인리히 하이네(독일, 1797 - 1856)의 44편의 번역시가 실렸다.
나는 시인 김남주를 말할 자격이 없었다. 시인의 짧은 삶은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를 웅변했다. 시인의 맑은 영혼에 비해 나의 삶은 구차했다. 그러기에 시인의 시에 얽힌 작은 인연을 언급할 뿐이다. 30년 전 골방에서 읽었던 몇 편의 시와 박광숙 선생님과 김토일과의 인연이 고마웠다. 작지만 소중한 인연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야겠다. 마지막은 뒤표지에 시인의 육필원고가 실린, 시집을 여는 첫 시이며 표제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쪽)의 전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 나에게 말했다 /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 길을 걷는다 /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녕 주정뱅이 (0) | 2019.08.29 |
---|---|
개인주의자 선언 (0) | 2019.08.26 |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0) | 2019.08.21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중국편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0) | 2019.08.16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0) | 2019.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