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빈 들에 나무를 심다

대빈창 2019. 9. 26. 05:53

 

 

책이름 : 빈 들에 나무를 심다

지은이 : 박광숙

펴낸곳 : 푸른숲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된 김남주 시인은 10년 만에 가출옥으로 88년 12월 출소했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세월 속에 옥바라지를 해왔던 동지 박광숙 선생과 결혼했다. 아들 토일이가 태어났다. 고난의 굴레를 벗어나 시인 가족은 강화에서 텃밭을 일구며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안타깝게 출소 4년 만에 시인은 힘겨운 투병생활을 뒤로하고 생을 마감했다. 시인을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강화 옛집에 내려와 아들 토일이와 함께 살아 온 삶의 궤적을 선생은 『빈 들에 나무를 심다』에 담았다.

IMF의 충격으로 구조조정, 명예퇴직으로 100만 이상의 실업자와 노숙자를 거리에 넘쳐나게 만들던 시절이었다. 국어교사였던 선생은 텃밭 농사를 지으며 완전한 농사꾼으로 변신했다. 집 주위에 앵두, 왕보리수, 산수유, 황매화, 왕벚나무, 살구, 복숭아, 은행, 감, 밤, 구상나무, 소나무, 시누대, 오죽, 주목, 백합, 라일락, 붓꽃, 접시꽃······. 등 꽃과 유실수를 심었다. 텃밭에 순무, 고추, 알타리무, 배추, 당근, 호박, 고구마, 팥, 콩, 옥수수, 참깨, 상추······.등 잡곡과 채소를 심어 자급자족했다. 몸을 지키는 방편으로 당귀, 황기, 천궁, 우엉, 더덕, 도라지, 강화약쑥 등 약용식물을 재배했다.

글 꼭지는 모두 31편으로 농사짓는 경험이 빚어 낸 흙내음이 물씬했다.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한문의 첫 구절에 불려진 낯익은 수신인들이 문득 반가웠다. 서홍관 선생(의사·시인), 故 문호근 선생(문익환 목사의 아들, 오페라연출가), 나카무라 선생(일본, 근대사연구학자), 강용주(구미유학생간첩단조작사건 구속자) 어머니, 장기표(재야운동가), 홍희담 선생(「깃발」의 작가)······. 책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제 씨뿌릴 준비를 서서히 해야겠습니다. (······) 여름이 무성하거든 오세요."(268쪽)

작년 초겨울 처음 찾아 간 선생집은 마을 안쪽 낮은 야산에 둘러 쌓였다. 집이 온통 잎을 떨군 활엽수와 바늘잎의 사철 푸른 나무에 갇혔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다만 나무 심는 기쁨을, 풀을 옮겨 심고 꽃을 가꾸고 밭을 일구는 것만을 생각하고 싶군요.”(85쪽) 선생이 강화도의 시골마을에 정착한 소식을 들은 지가 20년이 되었다. 그때 나는 관음도량 보문사가 유명한 석모도에 있었다. 옆 자리 동료가 이상하다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안면이 트여 말을 서로 주고받는 사이였다. 우리 동네에 청상과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그런데 왠 젊은 남정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리를 지어 그 집을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아기 울음소리마저 끊긴 적막한 시골에 몰려드는 낯선 젊은이들을 보고 그는 의아해했다. 그렇다. 여기서 단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시인 김. 남. 주. 이름 석자를 모르고 8·90년대를 건너 온 이들의 삶은 얼마나 부박한 것인가.  “남편이 없는 여자라는 것 때문에 누군가는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네가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하며 지켜 볼 것입니다.”(104쪽)

책과 사람의 인연도 따로 있었다. 그동안 책을 손에 넣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품절된 책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서 나는 읽고 싶은 책은 무조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품절된 것을 익히 알면서 읍내 서점에 책을 주문했다. 서점 주인은 단골 사정을 봐서 시중에 없는 책을 구하려 무진 애를 썼다. 성심은 거기까지 였다. 그동안 나는 선생의 글을 22인의 생태산문 모음집 『생명에 대한 예의』(환경과생명, 2002)에 실린 「그 겨울 내내 강화도 들판을 걸었다」를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책을 강화군립도서관에서 대여했다.  선생과의 인연도 어느덧 십여년이 다 되었다. 선생이 구슬땀을 흘리며 애써 가꾸고 거둔 수확물이 나의 손에 쥐어졌다. 매실효소, 한방 간장, 유기농 막장 등. 나는 작지만 소중한 인연에 기대어 선생의 손맛이 우러난 건강식품을 앞으로도 뻔뻔스럽지만 맛나게 얻을 먹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