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대빈창 2020. 1. 9. 07:00

 

 

책이름 :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지은이 : 세사르 바예호

옮긴이 : 고혜선

펴낸곳 : 다산책방

 

20세기 문학의 중심축은 라틴 아메리카였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 활자중독자였지만 시집 잡는데 게을렀던 나는 오늘, 위대한 시인을 알게 되었다. 페루의 광산촌 산티아고 데 추코에서 인디오와 메스티조의 혼혈아로 태어난 세사르 바예호 (Cesar Vallejo, 1892 - 1938)였다. 시인은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1904 - 1973)와 비교되었지만 둘의 삶은 너무 달랐다. 네루다가 낙천적이고 부유했다면 바예호는 비관적이고 가난한 삶을 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미국의 신부 시인 토마스 버튼은 “단테 이후 가장 위대한 우리 모두의 시인”으로, 영국 시인 마틴 시모어 - 스미스는 “모든 언어를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바예호를 평했다.

시선집은 번역가 고혜선의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 1998)의 개정증보판으로 모두 122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나의 눈길은 마지막 장  15편의 시에 한참 머물렀다. 이 땅에 처음 완역된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는 스페인 내전을 그렸다. 1930년대 중반 세계 전역은 파시즘의 군홧발 소리로 뒤덮였다. 행동주의 작가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는 말했다. “파시즘이 유럽 전역에 검은 날개를 펼쳤다”라고.  독일에서 히틀러,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았다. 이때 스페인에서 좌파연합이 우익을 꺾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전세계 민주주자들을 고무시킨 어둠을 밝힌 빛의 세례였다. 1936년 2월 민주적인 인민전선 내각이 들어섰다. 그러나 5개월 만에 스페인은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등에 업고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대 반파시즘 연대세력이 맞선 정의와 불의의 대결이었다. 국제연대 조직 《국제여단》은 50개 이상의 국가에서 3만5천내지 4만 명의 의용군이 참가했다.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의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카탈루냐 찬가』의 조지 오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비행대대를 조직해 공화파를 지원한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 특파원으로 내전을 취재한 생떽쥐페리, 무정부주의자 부대의 시몬 베유, 동서독 통일의 기초를 쌓은 빌리 브란트 등 세계적 작가, 사진가, 정치가들이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들었다. 화가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려 스페인 내전의 참혹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고, 20세기 최고의 이념 전쟁이었다. 인민전선의 패전은 프랑코 독재 36년의 시작이었다.

마지막은 고통 받는 세상에 대한 원망을 담은 「같은 이야기」(100 - 102쪽)의 1·2연과 6·7연이다.

 

나는 신이 /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고생한다는 걸 /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 어쨌든 나는 신이 /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

모두들 아는데··· 그러나 빛이 / 폐병환자라는 건 모릅니다. / 어둠이 통통하다는 것도··· / 신비의 세계가 그들의 종착점이라는 것도··· / 그 신비의 세계가, 저 멀리서도, / 정오가 죽음의 경계선을 지나가는 걸 구성진 노래로 / 알려주는 곱사등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나는 신이 /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 아주 아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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