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한시 미학 산책
지은이 : 정민
펴낸곳 : 휴머니스트
千計萬思量 / 천만 가지 하고 많은 생각이라야
紅爐一點雪 / 붉은 화로 위에 한 점 눈송이로다.
泥牛水上行 / 진흙 소가 물 위로 걸어가더니
大地虛空裂 / 대지가 허공에서 찢어지더라.
서산대사西山大師(1520 - 1604)의 「임종게臨終偈」(329쪽)다. 1987년에 출간된 생태시인 최승호의 세 번째 시집 『진흙소를 타고』가 떠올랐다. 책은 고전문학 연구가 정민의 첫 번째 책이었다. 시전문지 『현대시학』에 1994년 2월부터 1996년 5월까지 연재한 글을 가다듬고 정리했다. 1996년에 출간된 단행본은 500여 쪽에 그림하나 없이 활자만 빼곡했다고 한다. 내 손에 들린 책은 15년 만에 나온 완결개정판이었다. 요소요소에 삽입된 도판으로 양장본은 700여 쪽에 달했지만 책장을 넘기는 눈맛이 시원했다.
시인들은 분명 시전문지에 실린 글을 읽었다. "저 까마귀를 보라.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하지만 홀연 유금乳金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빛으로 반짝인다.······"(17쪽) 연암의 『능양시집서菱洋詩集書』에서 까마귀의 색깔 속에 감춰진 많은 빛깔을 관찰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시의 생취生趣나 생의生意를 강조했다. 나는 안상학 시인이 어린 딸과 시집의 속표지 색깔을 두고 대화를 나누면서, 까마귀의 날개는 검게 보이지만 실은 다채로운 빛깔이 숨어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18쪽) 윤성학 시인은 말했다. “시(詩)라는 한자를 풀어 보면 ‘언어(言)의 사원(寺)’이라는 의미인데, 사원은 대개 가장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은 건축물을 뜻합니다. 즉 시는 언어의 집합체 중 가장 세련된 형태입니다.”
“시마는 ’시 귀신‘이다.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263쪽) 나름대로 3대 문학평론가로 손꼽는 고명철의 시 평론집 표제는 『순간, 시마에 들다』(작가, 2006)이었다. 책은 중국과 한국의 한시를 주제, 형식, 작법에 따라 스물네 개의 주제로 분석·해석했다. 실린 작품으로 이백, 두보, 소동파, 도연명 등. 최치원, 정지상, 김부식, 이규보, 이덕무, 이옥 등. 현대시인은 조지훈, 박목월, 서정주 등. 나는 조선 최고의 시인 권필의 작품이 가장 눈에 뜨였다. 석주는 광해군 외척의 교만 방자를 「임숙영의 삭과 소식을 듣고 聞任茂叔削科」란 시로 풍자했다. 권필은 혹독한 형벌을 당하고 함경 경원으로 유배가 떨어졌다. 벗들이 건네 준 막걸리를 마시고 장독杖毒이 올라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시인다운 절명이었다. 권필(1569 ~ 1612)은 강화도에서 유생을 가르치며 시를 읊었다. 송해 하도리의 〈석주권필유허비〉가 오늘도 말없이 잡풀 속에 생각에 잠겼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 안 오는 밤에 읽는 우주토픽 (0) | 2020.02.26 |
---|---|
시를 어루만지다 (0) | 2020.02.20 |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 (0) | 2020.02.12 |
처형극장 (0) | 2020.02.06 |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0) | 2020.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