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분해하셨습니다. 작년 초겨울, 우리집 뒤울안 화계花階에 심겨진 둥굴레가 고약한 누군가의 손을 탔습니다. 어머니는 여름 한철, 화계 꽃나무 주변 우거진 풀에 낫질을 하셨습니다. 풀숲에 숨어있던 뱀에 놀란 어머니가 낫질을 중동무이하는 바람에 잡풀에 숨어있던 둥굴레는 용케 도둑의 손길을 피했습니다. “내년 봄에 캐 차 끓이려고 했는데······” 2008년 11월 2일 나는 김포 한들고개의 옛집에서 어머니와 짐을 바리바리 꾸려 주문도 대빈창가는 언덕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다음해 봄 봉구산 외진 산사면을 타다 둥굴레 군락을 발견합니다. 포대에 둥굴레를 캐오자 어머니는 둥굴레 뿌리를 손질하여 얕은 불에 볶아 둥굴레 차를 끓이셨습니다. 잔챙이 뿌리를 마당가 텃밭 한구석과 화계에 심었습니다. 둥굴레의 번식력은 놀라웠습니다. 잔뿌리나 염주 같이 생긴 동그란 열매를 땅에 묻으면 이른 봄에 땅거죽을 비집고 새싹이 솟았습니다. 10여년 동안 한결같이 둥굴레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해 초겨울을 회상回想합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 마을에 한강신도시 개발 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나는 그때서야 우리집 형편을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농사를 늘릴 마음으로 석모도의 문전옥답을 팔아 김포들녘에 자리 잡은 부모님은 남의 땅에 집만 얹혀 지냈습니다. 이웃사촌은 이사비용으로 기백만원을 손에 쥐어주며 빨리 나가라고 성화였습니다. 홀로 남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국도변에 들어 선 아파트에 정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기구독하던 『녹색평론』이 나의 결단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작은 외딴 섬에 삶터를 꾸렸습니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시절의 선택이 새삼 대견스러워집니다. 어머니는 큰 수술을 두 번이나 이겨내셨습니다. 어느덧 어머니가 미수米壽를 맞으셨습니다. 텃밭에 아픈 허리를 구부리신 어머니를 마루 유리창을 통해 내다봅니다. 차츰 눈가가 물기에 젖어듭니다. 위 이미지는 2019년 한해가 저물어갈 즈음, 저녁 산책에서 만났습니다. 인기척에 날아오른 기러기떼가 해넘이 노을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기러기들은 다랑구지 논의 떨어진 알곡이나 산자락 경사진 밭의 잔챙이 고구마로 고픈 배를 채웠습니다. 추운 계절에 녀석들은 차디찬 흙덩이를 부리로 헤집어 먹이를 찾았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녀석들이 인기척에 놀라 고달픈 날개짓으로 허공에 떠올랐습니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작은 외딴섬의 겨울나기가 열두해를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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