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이미지는 대빈창 해변의 나무테크 계단 쉴참에서 잡은 말도 주변 무인도입니다. 저는 왼쪽의 섬을 서해5도(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하나인 우도로, 오른쪽 섬을 함박도로 여겼습니다. 서해 5도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는 행정구역상 옹진군에 속합니다. 유일하게 강화군에 속한 우도는 민간인은 한 명도 없고, 우도경비대가 상주하고 있습니다. 미심쩍어하며 나는 이미지를 서도 해상의 섬을 잘 아는 이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왼쪽 섬은 함박도였고, 오른쪽 섬은 은점도였습니다. 아! 나는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며 은점도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은점벌 사건은 1965년 10월 29일 NLL의 은점도 갯벌에서 상합잡이를 하던 남쪽 어민 100여명이 북한 경비선에 집단 납북되었다가, 11월 20일 판문점을 통해 아무 탈 없이 귀환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때 비극의 씨앗은 뿌려졌습니다. 섬사람들은 그물을 놓거나, 맨손으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맨손어업 어부들이었습니다. 강화경찰서에서 북한의 모든 행적을 조사받은 섬사람들은 풀려나와 다시 생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내가 미법도에 첫발을 디딘 세월이 20여년 저쪽이었습니다. 그 시절 미법도는 모섬 석모도와 연결되는 배편이 없었습니다. 이장의 고기잡이배를 타고 미법도에 닿았습니다. 섬의 지형구조는 가운데가 움푹 꺼진 분지로 넓지 않은 들녘이 자리잡았습니다. 주민들은 벼농사와 고기잡이를 병행하는 반농반어의 8가구가 고작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주문도에 터를 잡으면서 서해 작은 외딴섬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삶을 살아 온 섬사람들은 군사정권을 떠받쳐주는 이데올로기 희생양이었습니다. 지난 신문을 뒤적이면 은점벌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미법도 어부들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주문도 사람들도 은점벌에 상합잡이를 갔다가, 납북되어 판문점을 통해 되돌아왔다고 당시를 회상합니다. 북한군에 의해 강제 납북된 어부들은 미법도 주민만이 아니라, 서도(西島) 군도(群島)의 어부들도 포함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76년 볼음도 오형근씨 사건을 시작으로 미법도에 공안사건의 칼바람이 불었습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이때 미법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서해의 작은 섬 미법도에 5건의 간첩사건이 꼬리를 물고 터졌습니다. 미법도 납북어부들은 군사독재 하수인들의 먹이감일 뿐이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은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했습니다. 촛불혁명으로 민주 정권이 들어 선 지금, 극우세력은 섬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선동질에 두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그들에게 사실 여부는 상관없었습니다. 무책임한 언론플레이로 민중들의 상처를 들쑤셔댔습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극우언론과 소위 애국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한적한 서해의 외딴 섬에 들이닥쳤습니다. 태극기부대의 험악한 쌍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연일 울렸습니다. 이른바 함박도 사건입니다. 함박도는 서도의 사람 사는 섬의 하나인 말도(唜島)에서 약 9㎞ 떨어진 무인도로 함지박처럼 생겨서 이름이 붙었습니다.
극우언론들은 벌떼처럼 웅웅 거렸습니다. 우리땅 함박도에 북한군이 레이더와 감시 장비를 운용한다고 떠들어댔습니다. 함박도는 등기부등본에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97’로 주소가 등록되었습니다. 78년 박정희 정권당시 ‘미등록 도서 지적공부 등록사업’에 따라 임야대장에 처음 올렸습니다. 그후 산림청으로 넘어갔고, 95년에 행정관할구역이 인천광역시 강화군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서해북방한계선(NLL)의 함박도는 1953년 정전협정 당시 이미 북한관할도서로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 작은 섬 미법도의 폐사지에 다시 미법사가 들어섰습니다. 붉은 색을 덧칠하려는 함박도의 악다구니와 뼛속까지 시려오는 은점도의 아픔을 뒤로 한 채 서글픈 목탁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허공에 흩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