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개성·서울 등 과거의 왕도王都와 근거리에 위치하여 고려 및 조선 시대에는 조운선의 통행로였다. 나라의 인후지지咽喉之地로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다. 대륙민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 선조들은 강화도로 대피·항쟁하여 이 지역은 일찍이 요새화되었다.’(최영준의 「강화지역의 해안저습지 간척과 경관의 변화」 中에서)
위 이미지는 강화군농업기술센터 농업인사랑방에 걸려있는 액자에 담긴 사진을 손전화로 다시 찍었습니다. 사진작가 月井 윤용완의 작품으로 용두돈대龍頭墩臺를 부감법으로 잡은 전경입니다. 강화도는 단군왕검의 개국의 얼이 살아있는 역사의 고장이면서 조국수호와 국난극복의 현장입니다. 한반도 최대 국방유적인 ‘5진鎭·7진보鎭堡·54돈대墩臺’가 강화도 해안을 빙 둘러 빼곡히 남아 구한말 격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최전방 요새를 지휘하던 5진은 제물진, 초지진, 용진진, 덕진진, 월곶진입니다. 진의 예하부대 진지인 7진보는 광성보, 선두보, 정포보, 장곶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입니다. 각 보에는 몇 개의 돈대가 소속되었습니다. 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감시·방어하고 정탐할 목적으로 접경지역 또는 해안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최전방 초소입니다.
광성보(사적 제227호)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불과 150여 년 전인 1866년 프랑스 해군이 침략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미국 해군이 침략한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백병전이 벌어진 치열한 전장이었습니다. 안해루安海樓라는 현판을 단 광성보廣城堡는 좌측에 광성돈대, 우측에 용두돈대, 손돌목 돈대가 자리 잡았습니다. 신미양요 당시 순절한 어재연·어재순 형제 장군을 기념하는 비 쌍충비각雙忠碑閣과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그리고 순국장병들의 순절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서 있습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을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모신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양지바른 나지막한 돌담장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손돌목 돈대는 너비 7.78m, 성곽 길이는 108m로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아 강화 일대가 훤히 조망되었습니다. 돈대의 원형으로 둘러 친 석축을 소나무숲이 한겹 더 에워 쌓았습니다. 용두돈대는 좁은 강화해협을 향해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 위에 축조되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광성보 풍경의 절정은 용두돈대였습니다. 용두돈대앞 강화해협은 포말을 일으키며 거친 물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손돌목 전설의 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