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이미지는 한달 전 박진화 화백의 작업실에 들렀다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손전화로 한 컷 담은 이미지입니다. 화백의 작업실은 볼음도 샘말에서 안말로 넘어가는 몇 필지의 논배미가 바다로 고개를 쑥 내민 얕은 둔덕에 자리 잡았습니다. 주문도에서 오후 2시 출항하는 객선을 타고 볼음도에 닿았으니, 3시경 무렵입니다. 출입문의 녹슨 열쇠가 꽂혀 있는 손잡이를 돌리자 클래식이 텅 빈 공간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빈 이젤과 마무리되어가는 대형 화폭이 벽에 기대었고, 석유풍로도 불을 밝힌 채 그대로입니다. 며칠 뒤 전화를 넣으니, 화백은 산책에 나섰다고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둔감한 나는 화백께 물었습니다.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강화읍 대산리에서 볼음도로 적을 옮기고 동네잔치를 여는 화백의 집들이에 소주 박스를 건넸습니다. 작업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 화백은 두 권의 도록『POSTECH 초대전 발밑과 눈』, 『강화發 분단의 몸: 박진화』을 품에 안겼습니다.
화백의 집은 바다를 등지고 안말을 둘러싼 그리 높지 않은 산에 바투 다가앉았습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 탐나던 집이었습니다. 주일에 한두 번 볼음도에 갈 적마다 빼놓지 않고 들르던 집입니다. 그 집은 천민자본주의에 어깃장을 놓는 젊은 아나키스트 부부가 살았습니다. 남편은 중앙대 연극과, 아내는 인터넷 진보신문 기자 출신으로 고난의 생태적 자급자족 삶을 3년간 이어갔습니다. 농사 지어봤자 빚만 느는 현실에서 갯벌 상합을 캐 잔돈푼을 만지며 함박웃음을 짓던 젊은 부부는 3년 만에 섬 생활을 접고 고향 강릉으로 떠났습니다. 샘의 물이 넘쳐흐르는 집은 새주인으로 화백을 맞았습니다. 그 집은 어쩌면 분단된 조국에서 고난의 삶을 이어가는 진보주의자들의 전통을 잇고 있었습니다. 박진화 화백은 민중미술화가로 진보미술단체 민족미술인협회(民美協)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화백은 볼음도 작업실에서 민족분단과 평화, 생명을 모티브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포스텍 초대전 〈발밑과 눈〉을 스케치한 글 「의심의 붓, 포스텍에 걸리다」에서 묘사했듯이 화백의 묘한 웃음은 악동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화백과 나는 인연이 닿는지 강화도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배편으로, 볼음도에 건너갈 적마다 선창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칩니다. 화백은 많은 예술인을 배출한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언제인가 배안에서 요즘 잡는 이대흠 시인의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창비, 2018)의 구수한 사투리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화백과 시인은 전남 장흥이 고향이었습니다. 나는 소설가 故 이청준과 해산토굴의 작가 한승원을 떠올렸습니다. 화백은 대뜸 작가 송기숙의 이름을 거들었습니다. 아! 광주민중항쟁의 시민군과 수습대책위원이었던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도 장흥 출신이었습니다. 마지막은 화백의 미학(美學)을 엿볼 수 있는 『POSTECH 초대전』 도록에 실린 「발밑과 눈」의 전문입니다.
“내 붓은 항상 현실을 의식하면서도 그 너머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인즉 화가의 눈은 발밑에서 우러나와야 하되, 그 발밑을 통째로 거머쥔 채 드넓은 창공을 향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발밑’은 자존심이다. 그 자존심은 내가 사는,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실재성(實在性)이자, 내력의 정신이며 전언(傳言)이다. 그러므로 나의, 아니 우리의 실존적 당위와 긍지는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발밑이 부추기고 또 부여한다. 화가의 ‘눈’은 꿈이자 이상이다. 하여 화가의 눈은 소명(召命)의 눈일 수밖에 없다. 왜 붓을 드는가?를 캐묻는 일은 내 눈을 소명의 눈으로 바꿔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너머’를 보려는 게 화가의 몫이고 생리며 역할이라면, 우리미술은 그런 눈의 권리(權利)에서 비롯되고 발휘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30여 년간 내 붓은, 내 그림의 생리와 권리에 대해, 그 역할에 대해 끝없이 노크하며 따랐다고 여긴다. 그 결과이겠지만 내 붓의 소망은 내가 있되 나를 초월한, 실존적 당위와 공동체적 꿈이 같이 서려있는, 그런 그림을 희망해 왔다고 자부한다. 아무튼 내 붓의 미학적 토대는 나는 나만이 아니다 라는 내 미의식의 신념, 그 성찰의 범주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예술적 성과는 ‘이 곳(발밑)’과 ‘그 너머(눈)’을 동시에 껴안는, 그 열망의 성패에 좌우될 거라고 여긴다. 어쨌거나 발밑의 당위 때문에라도 나는 항상 내 눈을 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붓은 살아있는 붓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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