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산골에 할머니가 두 손녀를 키우며 살았습니다. 큰 손녀는 예뻤으나 마음씨가 고약했고, 작은 손녀는 얼굴은 못생겼으나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고왔습니다. 큰 손녀는 이웃마을 부잣집으로, 작은 손녀는 고개 너머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작은 손녀가 할머니를 모시기를 바랐으나, 남의 눈을 의식한 큰 손녀가 억지로 할머니를 모셨습니다. 고약한 큰 손녀는 할머니를 푸대접했습니다.
끼니조차 제대로 못 이은 할머니는 작은 손녀를 그리워하며 먼 길을 나섰습니다. 배가 고픈 할머니는 작은 손녀가 사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작은 손녀는 할머니를 옛집 뒷동산 양지바른 터에 묻어드렸습니다. 이듬해 봄에 풀 한포기가 무덤에 솟아올랐습니다. 풀은 할머니의 굽은 허리처럼 꽃을 피워 올렸습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가지』(현암사, 1990)에서 발췌한 할미꽃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위 이미지는 우리집 화계(花階)에 모습을 드러낸 할미꽃입니다. 열 송이가 넘는 꽃을 피워 올렸습니다. 주문도에 터를 잡고 봉구산을 오르내리다 무덤가에 자라는 할미꽃 군락이 눈에 띄었습니다. 양지바른 봉분의 누렇게 마른 떼에서 할미꽃이 홀로 이른 봄소식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할미꽃 뿌리를 캐 재래식 변소에 던져 넣어 구더기를 없앴습니다. 그렇습니다. 할미꽃은 유독성 식물로 뿌리에 강한 독성이 있습니다.
할미꽃은 꽃잎 안쪽을 제외한 모든 곳에 흰색털이 많이 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무덤가의 할미꽃 두 송이를 캐다 뒤울안 화계에 묻었습니다. 다음해 봄이 되어도 할미꽃은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할미꽃이 산성비에 약하다는 사실을 책에서 보았습니다. 서해 작은 외딴섬에 산성비가 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식 과정에서 뿌리에 작은 상처가 나도 할미꽃은 죽는다고 합니다. 할미꽃 뿌리는 굵고 땅 속으로 곧게 뻗어 내립니다. 우리집 할미꽃은 작년에 두 포기가 잎사귀를 내밀었다가, 올해 들어서야 꽃을 만개했습니다.
“할미꽃이 용케 뿌리를 내렸구나”
어머니는 주문도에 이사를 오신 다음해 봉구산자락에서 할미꽃을 캐와 심었다고 합니다. 아랫집 할머니와 함께 이식했는데 우리집 할미꽃은 십여 년이 지나 이제 꽃을 피었습니다. 내가 캐 온 할미꽃인지, 어머니가 모종한 할미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할미꽃이 피어 난 자리는 뒷집 고양이들의 지름길입니다.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녀석들이 뒷집과 우리집을 오가며 경사지 흙이 무너져 작은 사태가 일어난 곳입니다. 할미꽃이 북주기 효과를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섬에 들어온 작은형이 할미꽃을 보며 말했습니다. 외포항에서 포트에 담긴 할미꽃 한 송이가 오천원에 팔리고 있다고. 물 건너 온 낯선 할미꽃보다 뒷산에서 이사 온 할미꽃이 믿음직스럽습니다. 어머니와 할미꽃이 함께 아프시지 말고 오래 사셨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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