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지은이 : 최승호
펴내곳 : 문학과지성사
나의 책장에서 가장 많은 권수를 자랑하는 시인은 최승호였다. 첫 시집 『대설주의보』(민음사, 1983)에서 최근시집 『방부제가 썩는 나라』(문학과지성사, 2018)까지 시집·시선집이 10권이나 되었다. 시인은 1954년 강원 춘천에서 출생하여 1977년 『현대시학』에 「비발디」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시인은 시보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 때 하루아침에 망한 집안 경제로 시인은 태어나고 자란 지방의 교대에 진학했다. 대학졸업이 다가올 무렵 시인은 뒤늦게 시와 인연이 닿았다. 정선의 교사생활은 시가 써지지 않았다. 자원해서 사북의 탄광지대로 옮겼다. 흑백의 단순한 절망적인 풍경이 시의 소재가 되었다.
시집은 2003년 《열림원》에서 출간된 시인의 열한 번 째 시집의 개정판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 R 시리즈〉 열여섯 번 째 시집이었다. 초판본에 실렸던 문학평론가 성민엽의 해설을 떼어내고, 부 구분없이 57편의 시만 실었다. 나는 한국의 생태시를 찾다가 시인을 만났다. 시인은 줄곧 현대 문명의 화려한 껍데기 속에서 썩어가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도시화·산업화 사회의 인간적 소외와 무너져내리는 생태계에 관심을 가졌다. 복간된 시집은 세속 도시의 욕망과 황폐한 풍경을, 시인 특유의 감성과 절제된 언어로 그렸다.
시인은 선禪과 속俗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빌려 자신의 시詩를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성스러움에서도, 속됨에서도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손이 두 개인 것처럼 성스럼움과 속됨을 갖추고 있되 두 자리를 떠나 있어야 한다.”고. 선禪의 냄새를 풍기는 표제를 제목으로 삼은 시詩가 시집에 없었다. 마지막은 표제와 가장 가까운 시로 생각되는 「아무 일 없었던 나」(75쪽)의 전문이다.
죽음 너머 / 내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
아무것도 없이 /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 없었던 / 나
그 무일물無一物의 고향으로 가는 문짝이 / 지금 내 안에서 퀴퀴하게 / 썩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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