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지은이 : 박준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시집을 닫는 마지막 시 「세상 끝 등대 3」(94쪽)의 전문이다. 시 제목이 낯이 익었다. 앉은뱅이책상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갔다.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를 펼쳤다. 그렇다. 첫 시집의 마지막 두 번째 시는 「세상 끝 등대 1」로 당신과의 ‘연안(沿岸)’에서의 추억을 회상하고, 마지막 시 「세상 끝 등대 2」은 속옷 바람으로 방문을 연 젊은 여자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시인은 ‘문단의 아이돌’로 불리는 인기 작가였다.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8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은 11만권, 첫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난다, 2017)은 16만권이나 나갔다. 6년 만에 출간된 두 번째 시집의 초판을, 출판사는 자신만만하게 3만부나 찍어냈다. 보통 시집 초판 부수는 2000부였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51 시편이 실렸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발문 「조금 먼저 사는 사람」에서 각 부에 실린 「그해 봄에」, 「여름의 일」, 「가을의 말」, 「겨울의 말」 시편을 읽으며, 시집을 사계절의 대응 구조로 보았다. 문학평론가는 시인의 인기 비결을 소월과 영랑, 백석에 가 닿는 한국어 詩의 ‘유전적 형질’을 들었다. 실험적이며 난해하기 그지없는 요즘 시들과 달리 전통적 정서와 가락이 독자의 서정을 자극한다고 말했다.
표제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두 편의 詩에 등장했다. 부제 ‘태백에서 보낸 편지’가 붙은 「장마」(48 - 49쪽)에서 시인은 누군가에게 두 편의 편지를 쓴다. 첫 편지에서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를 쓰다가 종이를 구겨버리고, 두 번째 편지를 썼다. 시의 마지막 연이다.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말했다
산문시 「숲」(79쪽)의 일부분이다. 시인은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들은 법이나 정치·경제처럼 힘센 것들이죠. 시는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한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질문에 시나 문학만큼 친숙하게 좌표를 주는 것도 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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