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마노탑(水瑪瑙塔)과 폐사지(廢寺址)를 돌아보는 답사일정을 짰다. 4시30분 새벽기도 종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7시에 주문도를 출항하는 삼보12호 1항차는 8시30분 화도 선수항에 닿았다. 강원 정선 정암사(淨岩寺)를 향해 엑셀레이더를 밟았다. 예상과 달리 너무 많은 차들이 길 위에 쏟아져 나왔다. 속절없는 시간만 흘러갔다. 정오가 넘어서야 강원 원주 치악휴게소에 닿았다. 치즈돈가스로 급히 허기를 때웠다. 사북에서 눈에 띄는 건물은 호텔뿐이었다. 80년대 중반, 나는 세상에 대한 알지 못할 원망과 분노로 막장인생에 다가섰다. 도계읍 대한석탄공사에서 퇴짜를 맞고 동원탄좌에 전화를 넣었다. 사북탄전에서 광부를 모집했다. 다음날 청량리역에서 예비광원들이 모여 사북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그날 저녁 인천 십정동 도금공장을 찾았다. 작은형은 기숙사에서 한 눈에도 꼬질꼬질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신열을 앓고 있었다. 그는 철없는 막내에게 눈물을 보였다. 정암사가는 길은 첩첩산중 깊숙한 골짜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천년고찰 〔太白山 淨岩寺〕의 일주문 현판을 올려다 본 시간은 2시였다. 주차장은 온통 ‘정암사 수마노탑 국보승격 지정 예고’를 축하하는 현수막으로 도배되었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410호 정암사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예고했다. 보살 한 분이 때 이른 폭염에 달아오른 경내 진입로에 화장실물을 호스로 끌어와 식히고 있었다. 전각은 근래에 신축한 건물들이었다. 나의 발걸음은 곧장 수마노탑으로 향했다. 좁은 골짜기에 들어앉은 당우들을 둘러싼 석축에 맑은 계류가 부딪히며 흘러내렸다. 그렇다. 정암사 계곡은 열목어 서식지로 천연기념물 제73호였다. 열목어는 물이 맑고 찬 산간계류에 사는 냉수성어류(冷水性魚類)였다. 여름에 수온이 섭씨 20도 이상 올라가면 살지 못하는 육식성 민물고기였다. 한반도는 열목어가 사는 지구에서 가장 남쪽 지역이었다.
수마노탑은 불교 7대 보석의 하나인 마노(瑪瑙)와 관련이 있었다.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갖고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했다. 도력에 감화한 서해 용왕이 준 마노석으로 탑을 쌓았다는 일화가 전해왔다. 물길을 따라왔다 해서 水(물)를 붙여 수마노탑으로 불렀다. 돌계단은 턱에 닿을 것처럼 가팔랐다. 계곡 물소리가 멀어지자 눈앞에 불현듯 수마노탑이 나타났다. 급경사의 계곡에 축대를 쌓아 탑을 앉힐 자리를 마련했다. 벽돌 모양으로 돌을 잘라 쌓은 7층 모전석탑이었다. 청동제 상륜부는 완전했다. 지붕돌 네 모서리마다 달린 풍경의 청량한 소리가 이마의 땀을 씻어주었다. 벽돌 틈마다 고비와 야생초가 뿌리를 내려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자장율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다섯 곳에 모셨다.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법흥사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였다. 수마노탑에서 정암사 경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정암사의 중심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소박한 법당이었다. 〈적멸궁(寂滅宮)〉 현판이 걸렸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불상을 모시는 대신 진신사리를 봉안한 법당을 일컬었다. 5대 적멸보궁에서 나의 발길이 닿은 곳은 이번 답사가 처음이었다. 고교 수학여행 때 설악산 가는 길에 들렀던 오대산 상원사에 남은 기억은 없었다. 천둥벌거숭이에게 문화재의 아름다움이 들어올 리 없었다. 이 땅 사찰의 창건설화는 칡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정암사의 들머리 마을도 갈래(葛來)였다. 자장율사는 진신사리를 모실 장소를 얻기 위해 밤새워 기도했다.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다가 멈춘 곳을 발견했다. 그곳에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절터를 앉혔다. 오후 3시 작렬하는 햇살을 등지고 정암사 일주문을 벗어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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