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법사지(興法寺址), 거돈사지(巨頓寺址), 법천사지(法泉寺址), 고달사지(高達寺址). 남한강변 4개의 폐사지(廢寺址)를 처음 접한 책은 1997년 출간된 민속학자 주강현의 『풀어낸 비밀속의 우리문화 2』 였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순조 23년(1823)에 젊은 선비 한진기는 한양에서 담양까지의 여로를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에 담았다. 저자는 그 책을 나침반삼아 ‘역사 속으로의 여행’에서 ‘망한 절터’를 돌아보았다. 원주시 지정면의 흥법사지에 도착하니 오후 5시였다. 절터는 섬강이 앞으로 흐르고, 영봉산(靈鳳山)자락이 감싼 아늑한 터에 자리 잡았다.
만 여 평에 이르렀다는 절터에 보물 제464호 삼층석탑과 귀부와 이수만 남은 진공대사탑비가 있었다. 여의주를 문 용머리는 사나웠고, 지대석을 움켜 쥔 거북의 발가락은 튼실했다. 삼층석탑의 건립 시기는 신라 양식을 따른 고려 전기 이후로 보고 있다. 기단은 너무 크고, 몸돌의 체감률도 제멋대로 비례가 맞지 않았다. 근래에 얹은 둥근 상륜부에 까치가 앉아 오가는 이 없는 폐사지의 적막을 깨뜨렸다.
탑비 뒤 공터에 승용차 두 대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마련되었다. 삼층석탑의 좌측은 진입로부터 참깨밭이었다. 뒤와 우측은 고구마와 호박이 심겨졌다. 대추나무, 벚나무, 당단풍 등이 절터를 구역 지었다. 석탑 정면은 잔디밭으로 얇은 판석을 깔아 사람이 다닐 수 있게 구획 지었다. 농가 몇 채와 차광막을 씌운 하우스 주변에 접시꽃이 무더기로 피어나 강렬한 햇살을 튕겨 냈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하루였다. 몸이 무거웠다. 얼핏 들으면 중세유럽의 도시같은 부론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부론면은 강원, 경기, 충북의 삼도(三道)에 접해 있다. 고려 개국과 함께 흥성했다는 흥원창(興原倉) 터를 알리는 입석이 강변 제방에 서있었다. 삼도의 물산과 세곡미가 이곳에 모여 들었다. 왕건과 견훤의 이름을 딴 길이름과 상호가 흔하게 눈에 뜨였다.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은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남한강 이곳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면사무소앞 식당에서 혼자 이른 저녁을 먹었다. 청양고추가 맵싸한 제육볶음이 허기진 속을 달랬다. 시원한 냉콩나물국이 그럴듯했다. 공기밥을 식탁에 내려놓던 주인이 TV화면에 눈길을 주며 혀를 끌끌 찼다. ‘개성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낯선 잠자리가 어수선했다. 새벽 5시 모텔을 나섰다. 거돈사지는 한계산 기슭에 자리 잡았다. 길가보다 한단 높게 석축을 쌓은 절터에 이르자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거돈사지를 지켜 온 것은 1000년 수령의 몸 둘레 7.2m을 자랑하는 느티나무였다. 너른 절터에 보물 제78호 원공국사탑비, 거대한 화강석 불대좌, 여기저기 흩어진 주춧돌이 세월의 무상을 견디고 있었다. 위 이미지는 보물 제750호 거돈사지 삼층석탑이다.
절터는 신라말·고려초의 절로 보기 드물게 일탑식 가람양식이었다. 금당터 앞의 삼층석탑마저 없었다면 거돈사지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탑 앞의 연꽃이 부조된 배례석이 제자리를 잡았다. 고려시대 비석 조형물의 시원양식으로 평가받는 원공국사탑비는 온전히 보존되었다. 용머리는 흡사 SF영화에 나올법한 괴수형이었다. 거북등의 귀갑문은 왕(王)자, 만(卍)자, 연꽃무늬가 교대로 새겨졌다.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이른 시간, 뻐꾸기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너른 절터 여기저기 전각이 앉았을 자리를 돌꽃 핀 장대석이 경계 지었다. 폐사지 길 건너 마을 뒷산의 밤나무 꽃이 만개했다. 골짜기 안쪽은 높은 제방으로 시선이 막혔다. 인적 없는 시각, 경사 심한 오르막길을 거슬러 제방 위에 올라섰다. 예상대로 농업용수를 가둔 정산저수지였다. 모내기 물을 내린 저수지는 산허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제저녁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커피와 호빵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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