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수마노탑(水瑪瑙塔)·폐사지(廢寺址)를 돌아보다 - 3

대빈창 2020. 7. 22. 07:00

 

충주를 거쳐 온 남한강은 원주 부론에서 섬강을 품고 여주를 향해 흘러갔다. 원주의 폐사지 세 곳을 찾아 가는 길은 남한강과 섬강을 넘나들었다. 거돈사지에서 법천사지의 거리는 3㎞ 이었다. 녹색융단이 깔린 들녘의 하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사적 제466호 드넓은 법천사지가 나타났다. 절터는 삼면이 산으로 들러 쌓인 넓은 평지에 자리 잡았다. 폐사지는 발굴조사가 한창이었다. 잡풀이 자라면서 드러난 주춧돌을 다시 감추었다. 새로 발굴된 구역은 마사토를 깔고 잔디를 심으면서 점적관수로 물을 주었다. 새로 끼워 맞춘 장대석이 생경한 빛을 발했다.

11세기 걸작 중의 걸작이라는 국보 제59호 지광국사탑비가 지대 높은 만개한 밤나무 군락아래 있었다. 높이 4.55m에 달하는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부도비 조성에 온갖 공력을 다했다. 든든한 지대석에 앉은 당당한 귀부의 바짝 치켜 든 용머리가 사납게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평을 듣는 비답게 이부에 새겨진 해, 달, 산, 나무, 봉황, 비천, 구름, 토끼 등 장엄은 끝이 없었다. 통일신라 양식의 당간지주를 찾아가는 길은 개망초만 무성했다. 이 땅의 농촌 사정은 어디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여기저기 주인 떠난 폐가가 눈에 띄었다. 남한강 유역 3대 폐사지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중이었다.

폐사지 순례는 몇 번 와본 답사객처럼 동선(動線)이 완벽하게 짜여졌다. 법천사지 당간지주를 지나쳐 골짜기 안으로 들어섰다. 차량 한 대가 겨우 빠져 나가는 농로를 따라가자 여주로 향하는 지름길이 나타났다. 산자락에 깃든 마을마다 ‘송전탑 건설 결사반대’ 현수막이 물결을 이루었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길에서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흰뺨검둥오리 가족을 만났다. 이제 막 부화한 듯한 9마리의 새끼가 아장걸음으로 엄마 뒤를 따르고 있었다. 골프클럽 주차장은 이른 시각인데도 고급 승용차가 만원이었다.

아침 7시 고달사지에 도착했다. 혜목산(慧目山) 고달사지는 앞면이 시원하게 트였고, 삼면이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들러 쌓였다. 절터는 아늑하고 포근했다. 고달사지는 한때 사방 30리가 모두 절땅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여주에 올 때마다 남한강변의 신륵사에 머물렀다. 폐사지에 새로 절이 들어섰다. 개신교로 말하면 개척교회라고 할까. 가장 안쪽의 중심 당우를 향해 발걸음을 떼는데 흰둥이 두 마리가 극악스럽게 짖어댔다. 적막한 산중에 울려 퍼지는 개짖는 소리에 발길을 돌렸다. 종무소 좌측에 찻집 다향루가 있고, 우측에 컨테이너 가건물 두 채를 들였다. 벽에 울긋불긋 페인트칠로 불화를 흉내 냈다. 연꽃이 심겨진 장방형의 연못에, 나그네의 발소리에 놀란 개구리들이 뛰어드는 물소리가 들렸다. 양봉업자가 자리를 잡았는지 수십 개의 벌통에 벌들이 윙윙 거렸다.

너른 절터에 띄엄띄엄 보물 제6호 원종대사탑비, 보물 제7호 원종대사탑, 보물 제8호 석조대좌가 자리 잡았다. 절터를 벗어나 골프클럽을 가로 지르는데 할머니들이 작은 배낭을 멘 채 승합차에서 내렸다. 반감이 솟구쳤다. 노인네들은 뙤약볕 아래서 골프장 잔디의 잡풀을 뽑을 것이다. 값비싼 골프 브랜드로 온 몸을 감싼 돈 많고 시간 많은 젊은이들은 ‘나이스 샷'을 외칠 것이다.  나그네를 고달사지로 이끈 유물은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이었다. 아뿔사! 나의 성급함이여. 보물 원종대사탑을 국보 고달사지 승탑으로 착각했다. 답사기를 쓰며, 유물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고달사지 안내판을 찍은 사진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 먼 길을 달려갔으나······. 이번 폐사지(廢寺址) 답사를 되돌아보니 탑비 순례이기도 했다. 비신없이 귀부와 이수만 남은 보물 제463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온전한 형체를 갖춘 보물 제78호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와 국보 제59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그리고 비신을 새로 갖춘 보물 제6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