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울릉도-독도를 다녀오다-4

대빈창 2018. 11. 1. 06:03

 

 

이미지는 내수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죽도와 관음도 앞바다이다. 첫날 울릉도 육로관광 A코스의 코끼리 바위가 바다에 떠있는 북면 평리에 가수 이장희가 거주하는 〈울릉천국〉이 있다. 나는 가수 이장희를 당대의 서태지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의 히트곡 「한 잔의 추억」, 「그건 너」는 애잔한 신파조의 트로트가 지배했던 음악계에 쏟아진 한 여름의 소나기였다. 버스기사의 말에 의하면 작년 겨울 울릉도에 2m의 눈이 쌓였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울릉도 바다의 영향 때문이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가수 이장희는 겨울 한철을 어떻게 보냈을까. 울릉도는 12월에서 3월까지 년중 1/3의 기간이 폭설과 풍랑으로 고립되었다. 도동항을 비롯해 관광 손님으로 먹고 살아가는 숙박·음식업소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가수 이장희를 떠올리며 나는 노후를 울릉도에 거주하고 싶었다. 우려되는 것은 젊은 시절 막 굴린 몸이 제대로 배겨날 수 있을까였다. 울릉도는 치과, 보건소, 노인요양병원 뿐이었다. 약국은 저동항, 도동항 두 곳 밖에 없었다. 겨울철 여객선은 육지에서 열흘에 한번 꼴로 입항했다. 동해 먼 바다의 겨울 폭풍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는 주문도는 추운 계절이 오면 한강에서 유빙이 떠내려왔다. 여객선이 얼음장을 피해 피양을 가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의료시설로 약국하나 없이 보건지소가 유일하다. 하지만 응급환자는 닥터헬기로 대도시의 대학병원에 후송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겨울철 울릉도에 머물다 몸이 크게 아프면 오도가도 못할 것이 아닌가. 기우일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섬인데, 내가 알지못하는 대책이 서 있을지 모르겠다.

울릉도는 작은 지자체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숙박업소는 일회용 물품사용을 자제했다. 전기자 보조금을 지원했다. 나는 자칭 얼치기 생태주의자였다. 첫날 울릉도로 들어가면서 바다 가운데 멀리 예인선에 끌려나오는 바지선을 보았다.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실려 있었다. 그렇다. 동해의 먼 바다 울릉도도 개발의 삽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이 살려면 기본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이 구축되어야 했다. 화산섬은 인프라 건설에 필요한 자재가 전무했다. 육지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바지선에 생활쓰레기가 잔뜩 쌓였을 것이다. 주문도와 매한가지였다. 관광객의 손에 딸려 온 쓰레기는 다시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갔다. 사람이 거주할 공간이 비좁은 울릉도에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롯데리아, 치킨집, 피자점, pc방, 편의점, 모텔, 식당, 버스, 택시······.

노후의 울릉도 거주가 힘들다면 발걸음을 자주 할 수밖에 없다. 다음 울릉도행은 여행사를 통하지 않은 자유 여행으로 꾸며야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역으로 가서, KTX로 강릉에 도착할 것이다. 강릉에서 묵호로 이동, 도동항 여객선을 이용해야겠다.  도동항에 편의시설이 집결해 관광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었다. 깨끗한 잠자리를 정하고, 렌트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4박5일의 편안한 여행을 해야겠다. 여행사를 낀 울릉도 관광은 시간에 쫓겨 몸이 제대로 따라주질 못했다. 울릉도 특산물 오징어는 현지에서 우체국쇼핑몰보다 더 비쌌다. 도동항의 반쯤말린 오징어 피대기로 선물을 장만해야겠다. 울릉도 오징어 조업은 추석에서 12월까지였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오징어떼가 서해와 남해로 이동했다. 오징어잡이 어부는 오징어떼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울릉도 인구가 줄어드는 가장 큰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