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아리랑
지은이 : 님 웨일즈·김산
옮긴이 : 송영인
펴낸곳 : 동녘
책은 평북 용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친 김산(金山, 1905 - 1938)의 전기였다. 김산은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국 상하이로 향했다. 1920년대 ‘동양 속 유럽’이었던 상하이에서 민족주의자 이동휘, 안창호를 만났다. 대담한 무력투쟁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의 김원봉, 오성륜과 교류하며 차츰 무정부주의자로 기울어졌다. 1921년 베이징으로 간 김산은 의학도로 베이징 협화의학원에 입학했다. 1923년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공산주의 계열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했다.
북경은 김산의 생애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금강산의 붉은 승려 운암 김성숙을 만나게 했다. 승려 출신 김성숙은 의열단의 이론가,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했다. 독립운동 진영의 좌우통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항일독립지사였다. 1927년 장개석 군대는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대대적으로 학살, 숙청하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공합작은 분열되었다. 김산은 조선 해방의 일환으로 중국 혁명을 지원하는 길을 택했다. 장개석의 쿠데타와 공산주의자 학살에 항의하는 진보주의자들은 광저우 시내를 점령했다. 이른바 ‘광저우 코뮌’이었다. 3일 동안 접전 끝에 코뮌은 진압되었고, 7000명 이상의 학살자가 발생했다. 조선인도 200여명이나 되었다. 시가지 전투에 참가했던 김산은 천신만고 끝에 광동성의 작은 마을 하이루펑(海陸豊)으로 탈출했다.
1928년 하이루펑도 국민당에 점령당하자 김산은 베이징으로 향했다. 1929년 김산은 베이징시 중국공산당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만주로 파견된 김산은 ‘조선청년동맹’과 중국 공산당의 지하활동에 전념했다. 1930년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인도되었다. 조국으로 압송되어 지독한 고문을 이겨내야 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의심을 받아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됐다. 화북에서 교편을 잡던 중, 당으로부터 무장봉기 명령을 하달 받았다. 수많은 청년들의 희생을 보며 그는 지도부의 관료주의에 분노했다. 베이징으로 돌아 온 김산은 1933년 4월 새벽, 집을 급습한 국민당 경찰에 또다시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전향을 강요당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35년 김산은 조선의 독립투쟁을 위해 혁명가들과 새로운 접촉을 시도했다. 지금까지 중국혁명에 힘써왔던 그가 중국공산당과 분리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국 혁명에 의지한 조선독립의 불확실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김산은 김성숙, 박건웅 등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했다. 중국공산당과 별개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좌우익 합작 ‘조선민족연합전선’ 조직에 착수했다. 1936년 4월 김산은 연안으로 이동했다.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경제·물리학을 가르쳤다. 여기서 님 웨일즈를 만났다.
내가 잡은 책은 개정3판으로 도서출판 《동녘》이 2005년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8·15 광복절에 출간했다. 표지는 강인한 27세의 김산이 감옥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2005년 국가보훈처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을 비롯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47명 등 모두 214명에게 서훈했다. 김산은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을 무릅쓰고 책의 초판은 1984년 3월에 나왔다. 옮긴이 송영인(당시 가명 조우화)은 노동운동가로 은신 중에 1941년 미국에서 출간된 『Song of Arriran)을 번역했다. 전두환 군사독재는 『아리랑』을 용공서적으로 낙인찍었고, 판매금지 했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나의 좌충우돌 독서편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이 세상의 빛을 본 지 35여 년이 지난 지금에 잡았다. 그 시절 미국 신문기자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 - 1972)의 중국공산당 대장정(大長征)을 그린 『중국의 붉은 별』을 밤을 패서 읽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Nym Wales,1907 - 1997)의 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우(Helen Foster Snow)로 남편이 에드가 스노우였다. 필명 님 웨일즈는 그녀의 조상이 웨일즈 태생임을 뜻했다. 1937년 7월 중국 서북부의 오지 연안(延安)은 지루한 장마기에 접어들었다. 젊은 여류작가 님 웨일즈는 33세의 혁명가와 두 달 간에 거쳐 20여 차례의 집중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김산이 트로츠키파로, 일제특무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죽은 것은 님 웨일스와 인터뷰를 마치고 1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트로츠키파는 실제로 트로츠키와 연결되거나 그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는 딱지가 아니었다. 당 입장에서 볼 때 나쁜 놈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국제주의자 김산은 자신의 모든 것을 중국혁명에 바친 탁월한 조선인 혁명가였다. 그는 왜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에서 트로츠키파로 몰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을까? 역사학자 한홍구는 「김산, 못다부른 아리랑」에서 『아리랑』이 끝나는 1937년 9월 이후부터 김산이 죽기까지의 알려지지 않은 1년을 추적했다. 1938년 섬감녕변구(陜甘寧邊區) 보안처에서 김산을 심사했다. 중국공산당은 의문을 가졌으나, 결론을 내릴만한 근거가 없었다. 강생(康生, 캉성)은 비밀리에 김산을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캉성은 1937년 11월,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 부책임자 역할을 마치고 연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죽을 때(1975년)까지 근 40여 년간을 중국 비밀경찰의 총수로 악명을 떨친 인물이었다.
조직 보호를 위해 한동안 출판을 미루어 달라는 김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님 웨일스는 1941년 미국에서 아리랑을 펴냈다. 1983년 중국공산당은 김산의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키는 복권을 결의했다.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한 것이다. 금강산(金剛山)을 의미하는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에 체 게바라가 있었다면 극동에 장지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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